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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an 11. 2019

여행시간, 시간여행.

그리운 시간과 계절로 날아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

2. 어쩌면 지금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필요할지도 모를 당신에게.


“상상해 본 적 있나요? 한 번의 겨울, 두 번의 크리스마스.”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2층 회전목마에서는 빙글빙글 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오르골 멜로디처럼 흘러나오고,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에 선물 상자처럼 늘어선 간이 상점들 사이로 감자와 소시지 익는 향과 연기가 연신 피어올랐다. 그해 겨울 가장 매서운 날로 기록된 1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나는 두 번째 성탄절을 맞았다. 한국의 그레고리력과 다른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였기에 가능했던, 우연인 동시에 행운이었다.


거저 얻은 두 번째 성탄절 밤, 파티가 열리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구석에서 나는 해묵은 지난 성탄절 일기들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오십 루블짜리 레몬 생강차 한 모금이 타임머신 역할을 했다. 머리맡에 놓인 선물에 입을 막고 소리를 질렀지만 함께 있던 카드 속 아빠의 글씨를 알아보고는 세상에 산타는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린 일곱 살의 12월 25일 일기를 시작으로 새벽까지 교회 친구들과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를 걸었던 열여섯의 크리스마스이브, 첫사랑의 손을 내 코트 주머니에 넣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이 내린 스무 살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후로 일기는 조금씩 뜸해졌고, 기억은 가까운 것일수록 오히려 가물가물했다. 2주 전 서울에서의 성탄절에 뭘 했나 한참을 콧잔등 찌푸리고 되짚어 보니 동네 작은 맥주집에 혼자 앉은 내 모습이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광장을 빠져나온 나는 모스크바 골든 링 호텔의 방에서 작은 파티로 두 번째 성탄절의 남은 시간을 채웠다. 말린 토마토와 빵 그리고 적당한 가격의 와인이 탁자를 채우고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이 흥을 돋웠다. 나는 TV 속 가수의 입을 떠듬떠듬 따라 움직이며 축제를 노래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적은 그해 성탄절 일기의 제목은 ‘여행의 기적’이었다.


여행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준비물은 역시나 떠나는 것 자체에 있다. 그리고 오직 그 용기로만 살 수 있는 값진 것들이 여행지에 있다. 그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었던 것만으로 내가 ‘두 번째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경험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믿었던 것을 찾고, 다른 누군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한탄했던 시간과 만난다. 어떤 이는 영원히 바뀌지 않을 거라며 외면했던 존재가 녹아내리는 것을 보며 감격할 것이다.

- ‘어쩌면_할 지도’ 본문 .


첫 여행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맞은 두 번째 아침, 기온은 영하 25도까지 떨어졌습니다. 샤워 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응시한 TV 화면 속 생소한 숫자를 보며 놀랐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훗날 확인해 보니 그 해 겨울 가장 추웠던 날이었더군요.

친구의 성화에 ‘들고 가긴 하겠지만 입을 일은 없을 거야.’라고 너스레를 떨며 챙겼던 발열 내의는 어느새 두 번째 피부가 됐습니다. 그 위에 셔츠와 스웨터, 그것도 모자라 두툼한 울 코트 두 장을 겹쳐 입고 나서야 외출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느 때보다 단단히 준비를 한 이유는 아마 오랫동안 기다린 만남을 앞둔 설렘이었겠죠.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날이 될지 모르니까요. 호텔 자동문이 열리는 것에 맞춰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타이밍 좋게 영화 어바웃 타임의 메인 테마곡 ‘About Time'이 흘러나왔습니다. 잠깐이지만 뺨에 내려앉은 찬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질 만큼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지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가슴이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르바트 거리를 지나 붉은 광장까지 걷는 내내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을 정도니까요.

요즘도 종종 그 길을 걷는 꿈을 꿔요.

2015년 1월 7일, 러시아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에 수도 모스크바에 있었고 그 하루를 오롯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보낸 것 모두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몰라요. 비록 숙소에 돌아온 뒤에야 그날이 그들의 성탄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요. 사진 한 장으로 저를 육천 팔백 킬로미터 거리의 겨울 도시까지 이끈 모스크바 성 바실리 대성당과의 만남도 감격적이었지만 종일 광장에서 발길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광장 가득 펼쳐진 화려한 축제 굼-야르마르카(ГУМ-Ярмарка) 때문이었습니다. 성 바실리 대성당과 굼 백화점, 크렘린 궁, 러시아 역사박물관에 둘러싸인 광장에 놓인 회전목마와 대형 스케이트장은 그동안 상상했던 붉은 광장의 모습과 정반대였습니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주위로 늘어선 네모 반듯한 상점들은 잊고 있던 동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어요. 오후가 돼도 기온은 오르지 않고 설상가상 폭설까지 쏟아졌지만 축제의 열기로, 소시지 굽는 연기와 사람들의 소음에 취해 추운 줄 모르고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 같아선 조명이 모두 꺼지고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머물고 싶었어요.


제 생애 가장 뜨거웠던 크리스마스였어요.

난생처음 보는 붉은 광장의 크리스마스 풍경 속에서 제 지난 성탄절 일기들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빨갛게 얼어붙은 볼을 씰룩이며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의 미소를 보며 잠시나마 그 시절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을까요. 원하던 것을 선물 받고, 좋아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른 날. 눈이 오는 것마저 모두 기적이었던 크리스마스로.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을 알게 됐어요. 크리스마스는 축복의 날이라는 사실 말이에요.

그 후로도 여행하는 시간은 종종 시간 여행과도 같았습니다. 언젠가 막연히 이름 불렀던 도시를 찾아 꿈이 시작된 그 날의 내게 말을 건네고, 그리운 이와 닮은 뒷모습을 보며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적었죠. 노신사의 한마디를 통해 훗날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제게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을 묻는다면 원하는 계절과 시간으로 날아가 그때 나와 만나는 것이라 답할 것입니다. 여느 어른처럼 크리스마스를 흘려보낸 제가 붉은 광장으로 날아가 그립던 하루를 보낸 것처럼요.


혹독한 추위와 쉼 없이 쏟아지는 폭설. 한겨울에 러시아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언젠가 다시 모스크바 겨울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분명 붉은 광장의 크리스마스 마켓 굼-야르마르카일 것입니다. '두 번째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있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시간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언젠가의 제 성탄절로.



모스크바 크리스마스 마켓 굼-야르마르카(ГУМ-Ярмарка)

장소 : 모스크바 붉은 광장 일대
개최 기간 : 11월 30일~2월 28일
홈페이지 : https://gum.ru/yarmarka/
연락처 : +7 (495) 788-4343 / info@gum.ru
영업시간 :  월 - 목 AM 11:00 - PM 10:00 | 금 AM 11:00 - PM 11:00 | 주말, 휴일 AM 10:00 - PM 11:00


다시 그런 밤이 있을까요?

1월 25일 금요일 저녁, '하나의 경험이 ___ 되다.'라는 제목으로 독자분들과의 만남 시간을 갖습니다. 2019년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가능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격려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안내 및 신청 페이지는 아래를 참고해주세요.


일자 : 2019년 1월 25일(금) 19:30

장소 : 서울숲 얼리브 라운지 (https://alliv.co.kr/)

https://brunch.co.kr/@mistyfriday/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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