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 프라하가 준 아홉 개의 선물

반짝반짝 빛나던 프라하의 봄을 추억하며

by 금요일
오, 프라하! (Oooh, Prague!)


열일곱 살 때였을 거예요, 지휘자이신 아버지를 따라 유럽에 간 친구가 보낸 엽서를 받은 것이.


이제는 사실 엽서 속에 어떤 말이 있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보고 싶어도 울지 말라는, 뭐 그런 장난스러운 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엽서 뒷면의 사진은, 그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세상에 무슨 이런 곳이 있나 싶었거든요. 건물이며 날씨가 꼭 붓으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워서 왜 나는 여기서 태어나지 못했지 하며 누군가를 원망할 정도였어요.


유럽이 바다 건너 있는 어느 나라의 이름인 줄 안 촌뜨기는 그 날부터 꿈을 꿉니다.

언젠가 프라하에 꼭 가 보기로.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 2015

물론 여행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공교롭게 '프라하'에는 그 운이 닿지 않더군요. 맛있는 반찬을 마지막까지 밥그릇 아래에 아껴두었다 먹는 심정이었는지는 몰라도, 막상 프라하에 가야지 생각하면 덜컥 마음이 내려 앉기도 했고요. 나중에는 신혼여행으로 가야지 하면서 미뤄뒀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십 수년이 지나고, 프라하는 그냥 꿈으로만 남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전혀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기적 같은 기회로 프라하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낭만의 도시 프라하가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는 봄에. 두어 달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꿈같은 일이었어요.


2015년 봄의 프라하는 그 날 받은 그 엽서 속, 그리고 제가 꿈꿔 온 장면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마저 아까웠죠. 자는 시간이야 더 말할 것도 없죠. 그리고 참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열일곱 그 촌뜨기와 말이죠.


지금부터 함께 보는 장면들은 2015년 봄, 프라하가 제게 안겨준 아홉 가지 선물입니다. 양 손 가득 들고 온 귀한 것을 함께 풀어보는 마음으로 이야기해볼까 해요.



1. 그 자체로 빛나는 시간, 프라하의 봄

블타바 강과 카렐교, 그리고 프라하 시 전경, 2015

많은 분들이 프라하 여행의 적기로 5월과 9월을 꼽습니다. 곳곳에서 축제가 열리는 9월의 프라하도 물론 멋지지만, 이 땅이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인 봄에 제가 있었다는 건 큰 행운이었죠. 프라하에서 저는 다양한 날씨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캔버스 위에 그린 그림처럼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아래 펼쳐진 중세 유럽의 건물들은 엽서에서 본 바로 그 풍경이었고, 언젠가 세찬 소나기를 만났을 때는 이 보석 같은 도시가 간직한 슬픔과 묘하게 동화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은 어떤 이의 마음도 흔들만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비싸고 시간 내기 어렵더라도 프라하는 꼭 봄에 가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직접 프라하의 봄 위를 걸으며 저는 다시 꿈을 꾸게 됐거든요. 이 곳에 또 오는 꿈을.



2. 천년 수도 프라하의 눈부신 유산

성 비투스 대성당, 2015


천 년 수도의 역사를 가진 프라하가 육백 년 수도의 서울과 뭐 그리 큰 차이가 있겠냐 싶지만 프라하 성과 카렐교, 구시가 광장 등 체코의 역사를 그 모습 그대로 품고 있는 대표적인 관광지들을 보고 있으면 왜 이 도시가 동유럽의 보석으로 불리는지 알게 됩니다. 블타바 강에 최초로 만들어진 카렐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구시가 광장의 천문시계는 오늘도 매시간 힘차게 종을 울립니다.


유명 관광지 위주의 여행은 좋아하지 않지만 천년 수도 프라하 곳곳에 산재한 유산들은 꼭 한번 찾아보아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 천년의 역사에 나의 여행도 일부가 될 테니까요.



3. 이 곳에 있음으로 인한 감동

페트르진 언덕에서 바라본 일출, 2015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 지나고 나면 창피함에 뒤통수가 아찔할 이야기지만, 그 순간은 분명 진심이었습니다. 프라하에서 맞은 첫 아침에 마주한 일출이 제게 그런 설렘을 줬죠. 너를 만나려고 잠을 깼나 봐,라고요.


오렌지빛 그러데이션이 펼쳐진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간 걸음의 끝, 제 눈 앞에 프라하 시 전경이 서서히 밝아오는데 그 순간만큼은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잠시 열일곱 그 촌뜨기가 되어 친구며 지인들에게 사진을 막 날렸습니다. 체코 시각이 한국보다 일곱 시간 느려 다행이었지, 자칫 크게 실수할 뻔했어요.


이 날 아침 본 이 믿을 수 없는 풍경은 엽서 속 장면을 밀어내고 제 머릿속에 새로운 '프라하'로 남아있습니다.



4. 보석처럼 반짝이던 프라하의 밤

트램이 있는 프라하의 밤거리, 2015

밤이라고 이 감동이 사그라들까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프라하의 야경은 오히려 다른 이들의 사진이나 엽서 속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어서 그 향취가 더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프라하의 밤길을 더 걷지 못한 저의 게으름을 꼽을 정도로요. 중세 유럽의 건축물 사이로 트램이 지나가는 밤거리 풍경과 해가 뜨기 전 카렐교의 고요 등은 몇 시간 어치 낮의 감동과도 바꾸지 않을 가치가 있었습니다. 시 프라하를 찾게 된다면 하루쯤은 늦잠을 자더라도 밤새 이 보석 같은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어요, 다행히도 프라하의 치안은 좋은 편이기도 하고.


함께 밤을 보내고 나면 더 깊이 알게 된다던가요? 모두가 잠들고 이 도시가 고요에 빠지는 시간, 그 때라면 좀 더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프라하와 마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그렇게, 더 사랑하게 될 테고요.



5. 낭만의 도시, 이 곳에선 모두가 로맨티스트.

카렐교 위의 프러포즈, 2015

인파가 가득한 토요일 카렐교에선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어 사랑 고백을 합니다. 감격한 그녀의 표정과 두 사람의 허그가 이어지고, 모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을 축복합니다. 이쯤 되니 잘 준비된 연기 같습니다.


로맨틱 프라하,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하는 낭만의 도시. 오래전 그 누가 이 도시의 '콘셉트'를 꽤 그럴듯하게 지어서인지, 아니면 이 땅이 사람들을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이 도시에선 다들 참 '풍부'해집니다. 아마 제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저도 그랬을까요? 다음 프라하를 찾을 때는 꼭 그녀와 함께 가야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로맨틱해질 수 있는지 궁금해졌거든요. 이 땅이라면 그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 진정한 감동은 길 위에서 꽃핀다.

하벨시장에 내린 소나기, 2015

언젠가 혼잣말을 했었죠, 나는 처음 걷는 길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를 물으신다면 단연 '길 위'를 꼽습니다. 유명 관광지 앞에 섰을 때보다 골목길을 걸을 때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사람들의 움직임과 표정에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받거든요. 프라하에선 그 특별함이 더했습니다. 골목길 하나하나까지 도시 전체가 특별했던 이 곳은 저와 같은 '걷는 여행자'들의 성지 같았고, 이 땅 위의 낭만을 찾아온 전 세계 관광객은 그들의 얼굴만큼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피해 여인이 달리는 이 장면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한 컷입니다. 저마다의 무게로 이 도시의 낭만을 완성하는 사람들. 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요?



7. 때론 가만히, 그렇게.

카렐교 위의 연주

늘 쉴 새 없이 걷는 제 여행도 종종 이렇게 멈춰 설 때가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선 화약탑과 구시가 광장의 천문 시계탑, 카렐교 전망대 등에 올라 프라하 시를 내려다 볼 때가 그랬죠.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하며 완성하는 그림처럼, 이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며 그 감동이 점점 진해집니다. 같은 장면이지만 첫 번째 셔터와 마지막 셔터의 무게가 다른 것도 그래서였겠죠. 걷는 여행자에게 발걸음을 쉬는 것만큼 아까운 것도 없을 텐데, 이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카렐교 위에서 거리 공연을 바라본 순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했습니다. 사람 가득한 이 다리 위의 장면을 멍하니 서서 바라보니 마치 이 수많은 사람들과 프라하가 한 덩어리가 된 듯 보입니다. 물론 저도 그중 일부였죠.


'보다 많은 것을 경험하는' 여행과 '적지만 더욱 깊이 느끼는' 여행에서 우리는 늘 고민합니다. 다음 프라하 여행에선 후자가 되어 한 프레임 안에 흠뻑 젖어보고 싶어요. 성격 급한 제 발이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8. 추억이 방울방울, 마음이 간질간질.

봄 하늘 위로 날아 오르는 비누 방울, 2015

모든 순간이 특별했지만, 가슴을 간지럽혔던 장면을 소개하자면 프라하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 비눗방울 퍼포먼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곳에서 제 마음이 열일곱 촌뜨기가 되어서인지 벌써 며칠째 매일 마주치는 장면인데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수백 컷을 누르곤 했습니다.


비눗방울엔 신기한 힘이 있어서 언제든 모두를 웃게 하고 뛰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비눗방울과 같은 프레임 안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에는 나이도 성격도 없어요, 그냥 행복한 행복한 미소뿐. 프라하라서 더 특별했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유난히 가슴이 가장 말랑말랑해졌던 이 날, 오랜만에 활짝 미소를 짓던 기억이 나네요, 저한테 더 이상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9. 라스트 씬, 곧 다시 만날테니까.

비오는 날의 프라하, 2015

참 많이 '돌아왔어요'. 하지만 만남보다 헤어짐이 훨씬 더 아름답게 남은 건 프라하 여행이 유일했어요. 프라하를 떠나던 날, 종일 폭우가 내린 탓에 우스꽝스러운 우비를 쓰고 다녔고, 촉박한 시간 때문에 빅맥으로 대강 끼니를 때웠지만 그것마저 이 곳에서는 낭만으로 느껴졌으니까요. 빗물이 찬 운동화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이 날 저는 이 도시의 운치에 흠뻑 젖었습니다.


카렐교 전망대에 올라가는 길에 창 너머로 본 프라하의 모습은 이 날의 모든 감동을 한 장면에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한 시간을 보낸 곳이라 라스트 씬으로 더 할 나위가 없었죠.


그렇게 프라하와의 작별은 웃으며 이뤄졌습니다. 아쉬웠지만, 슬프지 않았죠. 생각해보니, 이 여행이 프라하와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See you soon!



그렇게 꿈은 끝났지만,

여행 때마다 많게는 수천 장의 사진을 찍습니다. 이번 프라하 여행은 그동안의 열망만큼 더 많은 사진이 생겼는데요, 그중에서도 이 아홉 장은 이제 프라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들입니다. 엽서 속 비현실을 내 가슴과 마음 속 현실로 남겨준 순간들이고요.


앞으로 또 다른 도시들을 찾게 되겠지만, 이만큼 소중한 선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다시 보석 같은 것들이라며 올려놓고, 함께 열어보자며 손짓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다음 프라하 여행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 프라하,

안녕(bye), 다음 안녕(hi)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