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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름이라 지긋이, 강원도를 밟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by 금요일
그래, 강원도면 괜찮지 않을까?

떠나자는 그의 말에 제가 했던 이 대답은, 강원도라면 더 없이 좋다는 수긍이기도 했고 딱히 다른 곳이 있겠냐는 반문이기도 했습니다. 여름이 막 시작되던 6월, 1박 2일의 짧은 시간을 정해놓고 급하게 떠나려다 보니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중 가장 가까운 곳이 강원 일대였죠. 다행히 강원도는 제게 아직 미지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흔쾌히 떠났죠, 서너 시간 거리의 대한민국 땅을 향한 설렘은 너무 주책 맞잖아,라고 애써 무던한 맘으로.


입을 맞추는 순간에도 내 사람임이 믿기지 않았던 첫사랑. 그녀와의 스무 살 첫 번째 여행이 강원 고성군의 화진포 어딘가였으니 강원도와의 인연은 꽤 일찍 시작됐습니다만, 첫 이별과 함께 이 땅과도 오랫동안 외면하며 지냈네요. 시내 버스 뒤로 부옇게 흙안개가 피던 장면이 떠오르는 걸 보니 그 때가 아마 요만한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일출, 2015


올 초 모스크바와 프라하를 다녀오고 나서 오히려 카메라 없이 다니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이 땅의 흔한 풍경들에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었고, 그런 장면들에 기계적으로 셔터를 누르며 결국 지워질 사진들만 찍어내는 저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기도 했거든요. 강원도 여행을 떠난 것은 그 지루함이 목을 넘게 차오르던 시기였습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후, 2015

그래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혹시나 저처럼 항상 곁에 있어준 것들을 흔해 빠졌다며 일부러 외면했던 분들이 있다면, 여권에 도장을 찍는 소리로만 '여행'을 꿈꿔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입니다.


이 곳에 늘어놓은 사진들은 만 24시간 동안 저와 마주한 강원도의 여름입니다.

도착한 후에야 발견한 '떠나와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궂은 표정으로 재회 - 대관령, 동명항

비 혹은 바다에 젖은 산책길, 2015

회색도시 서울에서 볼 수 없던 자연의 색들, 벅차게 시선을 채우는 절경. 물론 그런 기대들이 '불금'을 포기하고 강원도로 떠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왠지 강원도라면, 강원도라면 놀라운 것을 보여줄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침부터 떨어진 비가 강원도에 가까울수록 제법 굵어지더라고요. 사람 하나 없는 횟집에서 먹은 형편없는 오만 원짜리 우럭 매운탕보다 비 쏟아지는 창 밖 풍경이 몇 배는 더 쓰렸어요.


그래도 큰 맘 먹고 온 강원도, 상상 속의 절경은 아니지만 약속했던 대관령에 들러 산등성이를 감상하고 첫 번째 목적지 동명항에 닿았습니다. -미룰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강행한 스케줄이었죠- 낭만의 수준을 넘어선 호우에 천오백 원짜리 파란색 비닐 우비를 의지해 젖은 항구 속을 걷다 보니, 그냥 이렇게 요상한 산책으로 하루가 가나보다 싶다가도, 문득 비 오는 항구의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는 생각에 묘하게 신이 났습니다. '그래 프라하에서도 이렇게 우비를 입고 즐거워했지'라고 중얼거리며 이색적인 바다 풍경을 만끽한 시간이었어요.


다행히 이 심술 아닌 심술은 해가 떨어질 때쯤 끝이 났습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비가 그친 동명항에서 보이는 건넛마을 능선과 구름은 꼭 산수화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그간 미뤄왔던 셔터를 모두 써버리게 했죠. 멋쟁이 신사 두 분 뒤로 펼쳐진 배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화이트와 블루만으로도 이렇게 풍부한 그림이 될 수 있구나, 하는.




하조대, 이 곳에선 누구나 다큐멘터리 작가

하조대의 색, 2015

1박 2일. 저와 그에게는 한 번씩의 일몰과 일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기회를 양양 하조대에서 쓰기로 결정한 그에게 아직까지 멈추지 않는 박수를 보냅니다. 많은 취미 사진가들이 사랑하는 이 곳은 왠지 한 손으로 쥐어질 것 같은 아담한 등대 너머로 펼쳐진 바다와 하늘의 광경으로 왜 이곳이 강원도와 연이 없던 저도 단번에 그 이름을 따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지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바위산 너머로 파도와 해넘이를 수천 장면으로 담을 수 있는 좌우 절경부터 하늘과 바다를 오롯이 한 색으로 담을 수 있는 눈 앞 수평선까지. 자연으로 이미 만들어진 이 프레임에선 비싼 카메라도, 좋은 포토그래퍼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누르기만 하면 작품. 하지만 이 오후의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답답한 파인더로 볼 시간에 두 눈에 조금이라도 더 담아두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진기는 곧 어깨에 맵니다.




주황빛 일출 앞에서 침묵할 수 있었던 행운

새벽의 실루엣, 2015

오랜만의 여행에서는 더욱 자연스러운 저녁 술자리. 마침 사람도 우리밖에 없다 보니 이야기가 금세 깊어지고, 그럴수록 옅어지는 시간을 계산하게 됩니다. 내일해가 뜰 때까지 각자에게 허락된 시간을. 달아오른 얼굴로 숙소에 몸을 누인 시각이 새벽 두시. 대단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지, 이대로는 너무 아쉽다는 다급함 때문인지 저는 켜둔 채 선잠을 잠시 청했고 다행히 두어 시간 후 해를 보러 나설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라 해가 무척 빨랐던 이 날, -다섯 시가 되기 전에 밝아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휴휴암 끝자락 돌부리에 앉아 해가 한참 떠오를 때까지 두어 시간을 멍하니 바라보고 특별하게 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낡디 낡은 헌 해를. 요즘 들어 종종하는 혼잣말도 한마디도 없이.


다행이었던 것은 꽤 긴 이 시간 동안 혼자였다는 것입니다.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오늘 날씨가 맑아서 다행이니, 일찍 나오기를 잘했다느니 그런 불필요한 말들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덕분에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떠올리고 소망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이 가장 빨리 닿는 곳 휴휴암

휴휴암의 아침, 2015

쉬고 또 쉰다는 뜻의 휴휴암(休休庵), 이 곳에서 온전히 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려놓음'입니다. 가장 내려놓기 쉬운 맘 속 걱정과 미련, 욕심부터 끝까지 쥔 채로 흔들리던 미움에 이르는, 이 곳의 말로 팔만사천 번뇌를 이 곳 어딘가 흩어놓고 나면 이내 부끄러워지지 않을까요? 그간 집착했던 것들에 대해. 다행히 이 모두를 지켜보고 받아줄 이 인자한 석불의 이름은 지혜 관세음보살입니다.


이 날 하루가 가장 먼저 휴휴암에 닿았습니다. 파도 소리가 목탁 소리를 가린 새벽부터 주황빛 그러데이션이 지혜 관세음보살을 모두 훑고 올라올 때까지 얼추 두세 시간을 이 곳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시각각 밝아지는 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 여행이 곡 이 아침을 위한 것 같다 느껴집니다.


이 날 저는 한껏 웅크려 기도하는 사내와 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애교 많은 세 아주머니에게서 이 날 해보다 밝은 빛을 본 것 같습니다. 다녀와 사진들을 보니 여전히 사람 있는 풍경은 즐겨 찍지 않지만, 무언가 얻기에는 그만한 것도 없구나 싶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모두가 너를 바람의 언덕이라 부르네

바람이 잠시 멈춘 언덕, 2015

삼양 목장 꼭대기까지 닿은 셔틀 버스를 내렸을 때가 이번 짧은 강원도 여행의 절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북한산 정상보다 높은 이 언덕 위 경치를 보고 한국에 이런 곳이 다 있었구나 했으니까요. 마침 어제 아껴둔 하루치 햇살을 더해 눈부시게 화창한 날씨까지 발 아래 깔리다 보니 몇 걸음인지, 몇 시간인 줄도 모르고 신나서 걷습니다. 이보다 낮은 동네 산에 오르면서도 선정적인 아웃도어 의류를 챙기는 사람들이, 이 언덕에선 봄소풍 원피스와 딱딱한 구두를 신고도 즐거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대한민국에 몇 개의 바람의 언덕이 있을까요? 제 이름만큼 흔한 수많은 '바람의 언덕' 중 어쩐지 공기가 부족한 듯 아득하기까지 한 이 땅 위는 그 이름이 단연 가장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바람 한 점 없던 이 날에도 말이죠. 어제의 저처럼 이 땅의 풍경들이 너무 흔하다 하는 이에게 저는 이 언덕을 꼭 가 보시라 하겠습니다. 역시나 우리는 여기서 너무도 보잘것없으니까요.



시간이 만든 그림, 결핍으로 채워진 풍족함

30초 어치의 풍경, 2015

해가 지고 난 후, 그리고 다음해가 뜨기 전. 미약하나마 빛이 있는 이 순간을 누군가는 왜 가장 어둡다고 할까요? 흐릿하게라도 볼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데 말입니다. 아예 보이지 않는다면 미련을 갖지 않을 텐데 작은 한줄기가 욕심을 갖게 하나 봐요. 조금 더 보겠다고 인상도 찌푸리게 되고, 그 욕심에 세운 가로등이며 조명들은 오히려 시선을 빼앗아 결국 더 볼 수 없게 해서 우리 눈이 더 어두워지잖아요.


조금 전까지 현실이었던 것들을 눈 앞에서 잃게 되는 오후 8시, 그래도 여유가 있다면 빛을 모아 마치 밝은 낮처럼 담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진 카메라가 허락한 30초 동안의 움직임을 찍은 사진들에선 쉴 새 없이 몰아치던 파도도 멈춘 듯 고요합니다. 바위 사이를 부드럽게 간지르는 듯한 파도의 움직임을 보니 마음의 여유가 만드는 너그러움이라 이런저런 의미들을 붙여봅니다. 그래도 시간이 만든 이 그림들,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래도 더 깊이 남습니다.


근데, 이 30초 동안 저는 뭘 했을까요? 사실 싸늘한 바닷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습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제 시력은 이 카메라보다 한참 떨어지니까요.



강원도, 그 곳에서 얻은 꼭 하루치 감동.


휴휴암에서 바라본 여명부터 하조대의 일몰,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여름 하늘과 비에 젖은 동명항까지. 세어보고 재어보니 이 곳에서 얻은 것들은 장소부터 날씨, 감정까지 이 곳에서 머문 24시간 동안 얻을 수 있는 전부였다 싶습니다. 돌아오는 길엔 뭐 놓고 온 사람마냥 다시 서울에 닿기 바빴지만 와서 늘어놓으니 하루치 치고는 제법 많았어요.


기대하지 않아서였다고 말하기엔 만 하루가 되지 않은 시간 동안 강원도가 제게 보여준 장면들은 너무나 강렬했습니다. 떠나지 못해 밟고 있는 이 땅과 공짜 숨을 내뱉던 하늘이 새삼 너무 대단하게 느껴져 한 걸음, 한 호흡이 조심스러워질 정도였으니까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참 좋은 선택이었다고 추억합니다, 강원도였다는 것이.


강원도에서의 여름맞이

아주아주, 괜찮았어요.


바람의 언덕,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