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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걷는 여행자의 기록

발로 하는 여행의 묘미

by 금요일
왜 걷습니까?

그게 가장 즐거우니까요


어느 여행이 안 그렇겠습니까만 저는 유독 많이 걷는 편입니다.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도 있거든요. 해외 여행이라도 떠나면 정말 '종일' 걷는 날도 있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열 시간을 햄버거 하나 먹고 걸었으니까요, 다른 곳도 아닌 영하의 모스크바를. 혹 중간에 지하철이라도 타려 하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풍경들을 '뚝' 잘라내는 것 같아 서운했다면 역시나 이상하죠?


왜 그렇게 걷느냐는 질문에 그냥 '그게 제일 즐거워서요'라고 대답합니다.

정말이에요, 발로 하는 여행. 꽤 재미있습니다.


같이 걷는 사람에게 미안해서 점점 혼자 가게 되는 아쉬움만 빼면요.


충남 아산, 2014

빠른 이동수단을 두고 길에서 '소중한 시간을 버리는' 여행이 뭐가 즐겁냐고 하시겠지만 이미 우리는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걷는 즐거움을요. 버스에서 내려 비몽사몽 에펠탑을 올려다보는 것보다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향해 걷는 것이 훨씬 설레고, 프라하 카렐교 위를 채운 사람들의 표정이나 움직임은 가만히 서서 감상하는 것도 즐겁지만 그 풍경 사이로 파고들어 어깨라도 함께 들썩거리는 편이 훨씬 즐겁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다양합니다. 그중 꼭 보고 싶은 '것'과 닿고 싶은 '곳'이 주된 이유가 되곤 하죠. 하지만 실제 여행의 백미는 구글 이미지 검색이나 홈페이지, 혹은 다른 이의 여행기에서 더 멋지고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유명 관광지가 아닌, 그 땅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얻은 것들이 아니었던가요?


길 위에서 마주한 장면, 그리고 그것이 내게 알려준 것들 말입니다.

어떤 여행을 하셨었나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얼마간의 기간 동안 '걷는 여행'을 하며 담은 기록들입니다.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고, 매일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죠. 대부분은 걷다가 만난 장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만 걷는 행위 자체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꼭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걷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저는 '걷는 여행자'입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 2015


'걷는 여행자'.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단어이지만, 여행의 대부분을 걷는 데 보내는 저에겐 이보다 어울리는 말이 없습니다. 참 많이 걸었습니다. 다리가 아프면 잠시 앉을 만도 한데, '많이 걸었으니 당연하지'라던가 '쉬었다 걸으면 더 힘들어'라는 논리로 저를 설득하며 발걸음을 재촉했으니까요. 덕분에 숙소는 하숙집처럼 곯아 떨어져 잠만 자는 곳이 되기 일쑤고, 그 흔한 카페 테라스에서의 여유조차 제 추억에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런 여행이 좋습니다. 덕분에 더 많이 보고 알 수 있게 되거든요. 어떤 도시를 여행해도 삼일 정도만 여행하면 길을 대강이나마 외울 정도니까요.


제 모스크바 여행의 가장 큰 목표였던 성 바실리 대성당으로 가는 길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인 1월 7일, 마침 지난 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던 영하 25도의 강추위에 꿈에 그리던 성 바실리 대성당, 붉은 광장 입구에 도착했지만, 성탄 예배 참석을 위해 늘어선 줄 때문에 반대편 입구까지 사십여 분을 돌아가야 했죠. 혼잣말로 온갖 욕을 하며 크렘린 궁을 빙 둘러 걸은 길 끝에서 마주한 성 바실리 대성당. 그 순간을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긴 산책(?)이 없었다면 그 성당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을까요? 그 길 위에서 느낀 희열이 저를 '걷는 여행자'로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록 강추위에 새끼 손가락이 얼어붙어 이내 성당 근처 굼 백화점에 뛰어 들어가야 했지만요.




어디서나 걷습니다, 그래서 발로 찍습니다

부산 해운대, 2015

걷는 즐거움을 알게 된 후에는 어디를 여행하게 되더라도 많이, 일부러라도 걷습니다. 그러다 보면 꼭 몇 번은 만나게 되거든요, 힘들어도 꾹 참고 걸어온 나를 위한 장면들을. 꼭 어딘가로 떠나는 거창한 의미의 여행이어야 하냐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매일 걷는 길 위에서도 늘 새로운 장면들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도 충분히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다행히(?) 사람의 발걸음은 단연 가장 느린 이동수단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씩 걸으며 본 장면들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에 선명하게 남죠.


해운대를 그렇게 열심히 걸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랄프 깁슨 사진전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가까웠던 해운대를 걸어보고 싶었거든요. 이 날 본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보다 해 질 녘 해운대 바닷가를 걸으며 본 장면들이 지금 더 또렷하게 남아있는 걸 보니 이 날의 걸음도 성공이었죠?


이렇게 무작정 걸을 때는 사진기가 손에 쥐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발'로 사진을 찍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원하는 장소에 닿아서, 장면과 마주해야만 다만 한 장이라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이 곳을 이렇게 열렬히 걷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다양한 거리의 표정들과 마주합니다

여의도 윤중로, 2013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방식의 걷기이자 가장 빠르게 여행하는 수단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짓는 표정이 몇 가지인가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죠. 연속해서 흐르는 사람들과 그 표정들이 만드는 장면들이 길 전체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 추억이나 여행지 사진을 떠올리면 사람이 주인공인 장면을 주로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아쉽게도 저는 가급적 사람이 없는 풍경을 찍는 편입니다만, 그럼에도 종종 '이들이 아니었으면' 하는 장면들에 눈이 번쩍 뜨이곤 합니다. 벚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한 윤중로에서 한 가운데, 캐리커쳐를 그리는 화가와 연인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단연 이 꽃 축제의 주인공보다 더 풍성하고 극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프라하 성에 모인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 공연을 보는 이들보다 더 즐거워 보이던 인사동 거리의 악사들, 영하 이십 도의 강추위에도 꿋꿋이 그림을 그리는 예술도시 모스크바의 거리 풍경까지. 그렇게 때로는 한 도시가 한 사람의 표정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함께 걷는 이들을 사랑하고요

서울, 2014

배경이 '길 위'이다 보니 아무래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많이 봅니다. 저만 이렇게 걷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함께 걷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때때로 그 걷는 사람 중 한 사람은 꼭 제 모습 같아서 혼잣말로 묻게 되죠. '왜 그렇게 걷느냐'고. 걷다가 보는 장면도 장면이지만, 걷는 것 자체로도 꽤 재미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조금 지나면 걷고 있는 나와 대화를 하게 되고, 비행기로 열두 시간이 걸리는 남미의 어느 도시보다 닿기 힘든 내 속마음을 만나기도하거든요. 흔하기 짝이 없는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이라는 것이 정말 있나 봅니다.


함께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대부분 뒷모습입니다. 그래서 거리가 배경인 제 사진들의 등장 인물도 대부분 뒤로 돌아있고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뒤를 밟은 게 되겠습니다만- 사람은 뒷모습이 좋은 것은 언제나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별조차 가늠하기 힘든 실루엣에서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걷는 여행은 종종 이렇게 '사람 여행'이 되기도 합니다.




걸음을 이어가게 하는 힘 역시 길 위에서 얻습니다

프라하 구시가광장, 2015

걷는 여행자에게 체코 프라하는 천국 같은 곳이었습니다. 골목 풍경 하나하나가 버릴 것 없이 아름다워서 잠시 멈춰 서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대표적인 관광지인 구시가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만큼 많은 명장면도 기억에 남지만 사진 속 저 아이의 표정이 꿈에 그리던 프라하를 걷는 제 표정과 꼭 같아서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걷다 보면 정말 많은 장면을 만납니다. 우리가 가만히 한 곳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마주하는 장면들의 수는 일 초를 수십, 수백 개로 쪼개서 세야 할 만큼 많죠. 그중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게 되지만 종종 눈 앞에 '반짝'하며 펼쳐지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비눗방울을 잡으려 뛰는 아이의 표정이나 모래사장을 차 내며 달리는 말의 형상이 그렇고, 노을 아래를 걷는 사람들이 체스 같은 실루엣을 만들거나 지나가는 자동차의 색이 건물과 기가 막힌 색 조화를 보이는 순간도 들 수 있죠.


그 장면을 보며 느끼는 희열은 설명이나 사진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희열에 중독되면 밥을 먹지 않아도 힘이 나죠, 마치 해가 지지 않는 한 계속 걸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이 걸으려고 해요


언젠가 모스크바의 텅 빈 골목길을 걸어가며 한 혼잣말이에요,

난 처음 걷는 길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구나


그 후로 제 여행의 대부분은 길 위에서 이뤄집니다. 몇몇 도시를 다니면서 그리고 다녀와서 얻은 결론이 그랬거든요. 내가 찾아간 곳보다 찾아가는 길이 더 많은 것을 안겨준다고. 그래서 앞으로의 여행에서도 많이 걸으려고 합니다. 목적지에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 만큼 더 얻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잊으셨을지 모르지만 띄엄띄엄 연재하는 이 매거진의 제목은 '걷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의 이야기의 주제도 제가 직접 걸으며 마주하는 것들이 될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시작으로 '걷는 여행'의 즐거움을 좀 더 많은 분들이 아시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제 저는 다시 나서 볼게요!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답답해서 말이에요.


서울 위례성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