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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Aug 04. 2015

2장. 모스크바로 떠나는 날

10시간의 비행, 그렇게 미친 여행의 시작

출발

미지의 땅으로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미친 짓을 하곤 합니다. 일 년, 아니 며칠만 지나도 ‘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지?’라며 뒤통수가 뜨끔해질 그런 '실수 아닌 실수’들이요. 2015년의 첫 월요일, 그야말로 새해 벽두부터 떠난 러시아, 모스크바 여행이 돌이켜보면 아마 제 33년 인생에서 가장 미친 짓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구나 꿈꾸던 유럽 여행마저 어렴풋한 목표로 삼고 있던 제가, 살아 생전 밟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땅으로 떠나게 된 거죠. 얼마나 몰랐으면 러시아는 일 년 내내 눈에 덮여 불곰과  눈싸움하는 곳인 줄 알았다니까요. - 오늘도 러시아는 평화롭습니다 -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건지

어쨌든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비행기로 아홉 시간을 꼬박 날아야 도착하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입니다. 아시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저의 여행 기록에서, 러시아 행은 비행 편 선택부터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주도나 일본 간사이 공항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비행 편이 있어 편한 시간대를 고를 수 있는  환경은커녕, 비행 편이 있는 주 2-3일에 그것도 하루 두어 대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야(?)합니다.  다행히 가격이 저렴한데다 현지 홀리데이 시즌까지 겹친 나름 골든 데이(?)에 비행기를 타게 됐죠.


월요일 아침의 공항 리무진


사실 저는 비행기보다 공항 버스를 좋아합니다. 여행보다 떠나기 전까지의 준비가 더 즐겁다는 ‘불편한 진실’처럼, 공항 버스는 집을 떠난 후의  첫출발이자 돌아오는 길의 마지막 정리인 만큼, 기대, 아쉬움, 혼란, 차분함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자 마음이 가장 말랑말랑 해 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집을 나서 공항 버스 좌석에 반쯤 누워 ‘여행형 인간’으로 변신하는 기분은 특별하기 그지없습니다. 제 여행 수첩의 기록도 대부분 이 공항버스에서 시작되죠.


하지만 월요일 출근 시간대의 공항 버스는 마치 인천까지 가는 인력거를 타는 듯, 설렘도 특별함도 없었습니다. 멈춘 버스 안에서 밖을 보면 보이는 건 짜증 가득 머금은 출근길 차들이요, 흐르는 건  시간뿐이니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버스 안에서 구겨지고 있는 시간이 두 시간을 넘으면서 수속 대기 시간에 면세점 위스키 심부름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비행기 시간 두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불상사는 면했지만, 돌아오는 길엔 그냥 공항 철도를 타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새해 첫 월요일의 인천 국제공항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올 때마다 이 넘치는 활기에 힘을 얻게 되는 공항 풍경, 새해 첫 월요일에도 이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저처럼 새해 벽두부터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부터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해외 출장에 언짢아 보이시는 분들, 골프 여행을 떠나시는 지긋하신 노년 그룹들, 한겨울을 피해 따뜻한 곳으로 신혼 여행을 떠나는 커플, 그리고 저처럼 겉으로 봐선 어딜 뭐하러 가렸는지 알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까지.


서로가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요, 공항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의 사람들보다 무신경하고 무표정해 보입니다. 가끔 함께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은 멀리서부터 밝은 기운이 느껴질 만큼 즐거워 보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눈에 잘 띄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그 굳은 표정들은 아마 이 날의 저처럼 단전부터 차오르기 시작하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가뜩이나 예정보다 공항에 늦게 도착해 탑승 수속 줄을 연신 확인하며 남은 시간을 계산하던 저는 머릿속이 본격적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했죠.


나만 모스크바로 가는 거야..?


저의 최종 목적지 모스크바의 셰레메티예보 국제 공항(Sheremetyebo International Airport)은 사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라기보단 유럽 여행을 위한, 유럽 각 도시로 향하는 경유지로 더 유명합니다. 직항 편을 운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유럽 도시를 가기 위해선 이 모스크바 공항을 거쳐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계 여행의 ‘광역 환승센터’ 역할을 하고 있는 공항이죠. 아마 언젠가 이 모스크바 공항을 잠시나마 다시 밟게 되지 않을까요?


그 얘기는 곧 오늘 이 대한항공 A953 비행 편을 가득 채운 이들 중 대다수는 저와 목적지가 다른 분들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 됩니다. 함께 떠나게 될 비행기와 얼굴 모르는 많은 동행자들을 보며 궁금해집니다. 이들은 어디로 향하는 건지. 여대생으로 보이는 무리를 보니 유럽으로 가실 것 같고, 저기 앉아 있는 금발 미녀분은 아마 고향 러시아에 돌아가시는 것 같고, 삼삼오오 모여 계시는 아버님들은 보드카 관광을 가시는 건지..? 갑자기 불안해지네요 '혹시 나 혼자 모스크바로 가는 건가..?'


어쨌든,  겨울해가 가장 빛나는 오후 열두 시 반, 그것도 새해 첫 월요일, 저는 드디어 미지의 땅 모스크바로 출발합니다. 2015년 새해의 시작은 참 무모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이 때쯤 제 여행 노트엔 단 한 문장이 남겨집니다.


‘이건 분명히 미친 짓이다.'

해가 지지 않는 열 시간의 비행


인천에서 모스크바는 열 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비교적 장거리 비행입니다. 제 여행 인생에서도 가장 긴 비행이었고요. 운 좋게 창가 자리를  배정받아 열 시간 내내 하늘 위 풍경을 구경하고자 했던 기대에 부풀었지만, 다른 승객의 취침 시간을 방해할 만큼 강했던 햇살 때문에 아쉽게도 무산되었습니다. 여섯 시간 늦은 모스크바로 달려가는 길은 마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가는 듯  끝없이 환하고 눈부셨습니다. 종종 빼꼼 열었던 두 뼘 크기의 창문 너머로 본 풍경 역시 매우 강렬했고요.


한국보다 시차가 6시간 늦은 모스크바로의 열 시간의 비행 시간은 '해가 지지 않는 비행'입니다. 열 두시 반에 출발해서 도착하는 시간이 오후 네시니까요. 그래서 가끔 열어보는 창 밖의 풍경은 내내 '한낮'이었습니다. 햇살이 너무 강해서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그래도 깜깜한 밤 비행보다는 나았죠 물론 -

혼자 이것저것 하면서 잘 보내는 성격이라 열 시간의 비행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잠 든 시간이 현지 시각으로 새벽 네 시 정도였으니 이 날 저는 30시간 가까이 깨 있었네요.


아, 그리고 아마도 저는 이 날,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벌판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다음 ‘극한 여행’은 이 곳으로 와 보고 싶군요.


이 곳이 시베리아 벌판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창 밖에 겨울이 가득해 그대인 줄 알았네


생각보다 즐거웠던 열 시간의 비행이  마무리되어가는 시각, 착륙이 가까웠다는 기내 방송을 들으니  그동안  외면해왔던 제 안의 긴장감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오후 네시 삼십 분, 이미 어둠이 깔린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열 시간 비행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됩니다. 


도착이 임박한 시각, 작은 창 밖을 보며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연발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저는 정말로 미쳤던 걸까요? 난생 처음 보는 창 밖 풍경은 보는 것 만으로도 손 발이 차가워질 정도로 '추위' '한기' '냉기'가 가득했습니다. - 그러구나, 아 여기가 러시아구나 -


빈 틈 없이 눈이 쌓인 마을  풍경하며, 배가 있지 않았다면 바다인 줄 몰랐을 꽁꽁 얼어붙은 얼음바다까지. 네, 러시아에 잘 도착했군요. 그리고 수속을 위해 걸어가던 길에 잠시 서서 뱉어본 입김을 보며 이 곳이 러시아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헛웃음은 점점 더 잦고 망측해졌고,  머릿속엔 한 문장만이 남았습니다. 


‘당황하지 말자'


현지시각 오후 4:30

무사히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



‘시계 맞추기'로 시작되는 여행


여행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처음 밟아보는 땅의 강도가 한국보다 무르다던가, 코 끝에 닿는 새로운 공기에서 치즈 냄새가 난다던가 하는 한가로운 감상이 아니라, 바뀐 시차에 맞춰 시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한국보다 여섯 시간이 느린 모스크바의 시차에 맞춰 굳이 시계를 벗지 않고 시간을 맞춰 보겠다고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시계 바늘을 돌리고 나서야, 이 미친 여행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준비가 끝납니다.

벌써 저녁시간

모스크바의 첫인상, 셰러미티예보 국제 공항


모스크바를 처음 찾는 Stranger 들이라면 누구나 이 셰러미티예보 공항을 통해 모스크바의 첫인상이  머릿속, 맘 속에 각인되고 오랜 시간 동안 선입견 아닌 선입견이 될 것입니다. 오후 네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도착한 이 공항에서 처음부터 적지 않게 당황했던 기억은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내내 실성한 듯 실실 웃고 다닌 제 모습까지 도요- 아직 한창인 시간에 텅텅 빈 이 공항의 풍경이라던가, 열 시간 비행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깊은 밤 풍경, 역시나 딱딱하고 불친절한 공항 직원들의 반응들과 택시 호객에 실패하자 알 수 없는 말들을 구시렁대던 저의 첫 대화 상대 등등. 돌아오는 날 다시 찾은 이 곳에서 그 오해들이 많이 희석되었지만 첫 날 느낀 이 공항의 모습은 이 큰 도시의 대표 공항답지 않게 공허하고 고요한 느낌으로 남습니다.


단 하나의 빛이 있었다면 수속을 마치고 나온 길에 본 공항 내 상점 여직원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를 심쿵에 사로잡힌 후 ‘아 이게 러시아구나’라며 처음으로 이 미친 여행의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어요.


쉽지 않은 입국 심사를 마치고 한 숨 돌리고 땀이 좀 식고 나니, 한겨울 러시아 밤바람이 이제야 소매 틈으로 스며듭니다. 이제 정말, 왔습니다. 모스크바에 말이죠.

셰러미티예보공항, 러시아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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