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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25. 2015

#13 내가 가진 제주 조각

언제쯤이면 당신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제주, 여전히 너는 내게 설렘이어라


여권 없이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땅.

저는 종종 이 곳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고작 몇 번의 여행으로 이 섬에 대해 말할 수 없겠지만 '생소함'도 아름다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이 곳만큼 아름다운 곳을 꼽을 수 없을 테니까요. 부모님 시절에야 평생에 한 번 신혼여행 때나 갈 수 있었다던 이 바다 건너 미지의 땅은 이제 주말마다 갈 수 있는 '근교'가 되어버렸고, 아무도 제주 신혼여행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쩐지  그때보다 더욱 제주를 사랑한다 고백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섭지코지, 2014

하늘을 통해 혹은 바다를 통해, 결코 걸음으로 닿을 수 없는 '섬'이라는 고립된 땅이 주는 묘한 흥분을 좋아합니다. 도착하고 떠나는 분명한 맺음을 좋아합니다. 무작정 걷다가 닿을 수 없는 물리적, 심리적 고립은 여행자를 더욱 간절하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제주는 더 함께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 곳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들의 '보물섬'이 되어버린 곳, 오늘의 이야기는 제주의 조각들입니다.



바다가 만든다, 섬이 내보인다.

구좌읍, 2014


제가 가진 제주의 기억 대부분은 파란색입니다. 몇몇은 녹색처럼 보이기도 하니 '바다색'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이 섬에선 종종 바다가 이 섬을 완전히 덮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도 눈은 바다를 향해있고 입으로는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제주의 바다는 그 풍부함만큼 아름답고 늘 제 주변에 닿던 손들 이 없어 장면 하나하나가 새롭습니다. 만약 제주가 섬이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 한 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쉽게도 이 커다란 섬에선 제 양껏 걸을 수 없었지만, 바다가 주는 설렘이 그 아쉬움을 채워줬습니다. 뚜벅뚜벅 대신 쿵쾅쿵쾅, 살금살금 말고 두근두근. 이 섬에서의 제 여행은 쭉 그랬습니다.



고마웠어, 월정리 해변

월정리, 2014

월정리 해변은 어느덧 제주의 낭만을 대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과거엔 외부인보단 제주 주민들이 주로 찾는 핫 플레이스로서 입소문을 탔는데 어느새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야 할 곳, 제주 여행 인증샷 찍는 곳이 되었죠. 물론 저도 이 월정리를 작년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적했다던 예전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여느 카페거리처럼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선 풍경은 사실 크게 감흥이 없었습니다. 물론,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비현실 같은 색의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선 감히 도시와 비교할 수 없겠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제주를 찾을 때면 언제나 저는 지쳐 있었습니다. 해방구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제주를 가기 전 일부러 과로를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공항에 닿자마자 으레 가장 먼저 달려갔던 이 해변의 바람과 소리, 그저 차가움뿐인 커피 한 잔은 그래야 제맛이 나더군요. 이제 더 이상 제주 같지 않아진 월정리는 졸지에 큰 돈을 벌어 거리감이 생긴 친구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가지 않으려 합니다만, 혹시 모르죠. 제주 국제공항에서 저도 모르게 발길이 이 곳에 닿을지도요.


내 맘속 제주, 한림항

한림항, 2012

그런 면에서 가장 친근했던 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림항'입니다. 핸들 돌아가는 대로 가보자 하던 중에 단순히 '배가 고파서' 들어선 이 곳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입니다. 녹이 슨 어선과 그물 정리하는 어부들 등 이 작은 항구의 풍경은 제주만의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 낡음이 유독 멋스러웠던 기억입니다. 시간이 멈춘듯한 이 항구 앞에서 잠시 배고픈 것도 잊고 두어 바퀴를 돌았습니다.


사실 한림항은 제가  난생처음 제주를 찾은 날 가장 먼저 닿은 '바닷가'였어요. 어쩌면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칠해진 기억일지 모르겠지만 유채꽃이 막 올라오는 초봄 공기와 푸른색 가득한 하늘, 요란하지 않은 항구 풍경이 참 좋았습니다. 더불어 이 날 허기를 채워준, 제주에서 많이 난다는 '딱새우' 듬뿍 담긴 그 날의 짬뽕 맛도 그 추억에 일조했죠.


내겐 너무 낯선 친구, 제주 중문

중문 해변, 2012,

딱 한번 가 봤던 중문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고급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해변은 외국 유명 해변 못지 않게 아름다웠고 관광객들을 위한 산책로와 편의시설도 완벽한데다, 고운 백사장이 길게 뻗은 이 그림 같은 해변은 휴식을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곳이겠지만 제가 원하는 '회복'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고급 호텔을 들어설 때의 뻘쭘함 비슷한 것들이 해변을 걷는 내내 손 끝을 저리게 해 해변 구석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냈고, '휴식 시간'이라며 저를 위로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 곳은 제겐 '한 번으로 충분한' 곳이 되었습니다.




걸음을 붙잡는 제주의 해거름

수월봉, 2012

꼭 한 번은 해지는 제주 해변의 장면을 보고 싶었습니다. 해변 끝자락의 커다란 바위 위에 서서 바다를 맞대면 집에서도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육지의 바다와 다를 것도 없는데, 제주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나 봅니다. 확실히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면 바다가 조금씩 베어 먹는 해의 부스러기 하나 놓치지 않으려던 제주 새내기의 눈빛이었달까요?


그래서 인천 혹은 한강 어딘가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사진들은 제게 소리와 탄성으로 들리고, 시리고 따가운 촉감으로 느껴집니다. 쉬지 않고 누르는 수백 장의 사진이 대부분 똑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어쩌면  그중 한 장엔 그 날의 세찬 소리가 기적적으로 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오르고 다시 내려서, 용눈이 오름

용눈이 오름, 2014

제주가 너무 좋아 귀국(?) 일도 미룬 채 약 3주간을 제주살이 하다 온 그는 제게 '제주의 백미는 오름'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속는 셈 치고 용눈이 오름을 올랐습니다. '언덕이라더니 이건 산이잖아, 괜히 입구에 매점이 있는 게 아니구먼'하고 투덜대면서요.


동그란 언덕에 딱히 정상이랄 것도 없었지만 원 없이 시야를 내뻗을 정도로 오르니 이만큼 높지 않았으면 무척 서운할 뻔했습니다. 여름의 푸르름에는 비할 수 없지만 채워지고 벗겨진 땅의 색 하며 저 멀리 어스레 보이는 바다와 성산 일출봉까지. '제주는 바다'라는 제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왜 들 그렇게 '오름, 오름'하는지는 알겠더군요.

무엇보다 오름의 백미는 '걷는 맛'이었습니다. 내내 메뚜기처럼 '볼만한 곳'을 널뛰기하듯 다닌 제가 모처럼 발을 내찰 수 있던 시간이었죠.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은 거세지고 꼭 걸어 오르는 만큼 풍경의 감흥이 더해집니다. 그 즐거움에 숨 한 번 돌리지 않고, 걸음 한 번 놓지 않고 단숨에 오를 수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중턱쯤에서 만난 소떼가 특히 반가웠습니다. 오르고, 내리고. 그가 말한 오름의 즐거움은 사실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섬의 것과 인간의 것


어느덧 이 섬 곳곳이 제가 사는 서울의 작은 동네보다 훨씬 더 '세련된' 도시가 됐다는 것을 느끼면서 제주에 대한 막연한 제 동경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지만 때로는 사람이 만든 풍경들이 이 섬이 내어놓은 것들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도 이 섬의 일부이기에. 다만 한 가지 바람은 그것들이 너무 급하지 않게, 조금씩 섞여나가는 것입니다. 다행히 고개를 조금만 부지런히 돌리면 태초의 섬 그리고 미래의 제주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아직 까지는요.


바다를 따라 달리는 제주의 풍경은 언젠가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지만 하루쯤 마음을 먹고 섬의 속살로 파고들면 익숙하고 편안한 사람의 것들과 마주합니다. 여행의 긴장은 이내 풀어지고 여름방학 맞아 외가에 놀러 온 어린아이가 되죠. 마치 겉은 바삭하고 속은 보드라운 빈대떡 같습니다. 이중섭 거리의 공방들, 올레시장 상인들의 표정이 특히 그랬습니다. 결국 사람 사는 게 별 거 있겠냐면서도, 그게 이 먼 곳에서 발견한 것들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물론 저도 제주를 사랑합니다, 당신과 같아요.


누구나 동경하는 제주, 혹자는 제주에 살 꿈을 꾸며 오늘도 감상에 젖고, 홧김에 꺼낸 사표를 다시 서랍에 넣기도 합니다. 저 역시 언젠가 함께 제주에서 살겠노라고 그녀와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확률이 더 높지만, 그 말 한마디로 우리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이 섬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갈 수 있으니까요.

제주 국제공항, 2012


불친절한 섬 제주는 아직도 저를 잔뜩 긴장하게 합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이럴 것 같습니다. 


가끔 이렇게 그 섬의 조각들을 몇 점 주워와 책장이며 선반에 올려놓고 다음 여행을 꿈꾸는 것이 제가 이 섬을 사랑하는 방법의 전부이지만, 이제 굳이 제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모두의 꿈이 된 땅이지만 그럼에도 종종 이렇게 중얼거릴 날이 있을 겁니다.


아, 오늘은 정말 제주가 필요해.

라고.


이런 것도 중독이라면 중독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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