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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17. 2015

#12 광안리에서 해운대, 다시 광안리로.

늘 기분 좋은 걸음이 있었던 도시, 부산.

요봐라, 요래 직인다 안카나


제게 부산은 고2/고3 2년이나 같은 반이 되고서도 왜인지 말 몇 마디 해본 적 없는 친구처럼 선뜻 달려가기 두려운 도시입니다. '부산'이라는 이름, 그들만의 특별한 언어 -경상도 방언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부산하면-, 자이언츠와 돼지국밥 등으로 똘똘 뭉친 느낌 때문일까요? 그래서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야 처음 부산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장에서 뒤를 돌아 처음 '부산역'이란 세 글자를 보았을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오기 쉬운 곳이었는데 말야.'라고.


시민들이 하나씩 내어놓은 부산의 기억들

기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바닷가 도시만의 풍경은 서울에 '갇혀있던' 제게 무척 흥미로웠고 저마다 다른 시대를 사는 동네들의 풍경에 매료되어 그 후 매년 적어도 한 번은 습관처럼 부산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도시는 새로운 것들을 기다렸다는 듯 늘어놓았습니다. 분명 지난번에 지겹게 보고 간 곳인데도 말이죠.


부산행 기차에선 꼭 이렇게 중얼거려요.


'부산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지친 일상에선 여권을 챙기거나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새로운 풍경에 회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고, 사진을 찍으러 가도 제가 있던 곳과는 다른 풍경을 담을 수 있어 좋다는 뜻이기도 하며 원 없이 바다를 볼 수 있는데다 맛있고 저렴한 음식들도 많거든요. 하지만 무엇보다 부산이 종종 그리운 이유는 걷기 참 좋은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다를 따라 걸었던 광안리부터 해운대까지의 그 길은 제 정서를 촉촉하게 만듭니다.



오랜만이야, 아침의 광안리

광안리의 아침, 부산

아침 일찍 서두르면 점심 먹기 전 광안리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이면 제가 좋아하는 오사카에도 닿을 수 있지만 왠지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해외 여행보다 일부러 몇 개 빼먹은 가벼운 배낭 매고 나서는 국내 여행 특유의 편안함이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매일 타던 동네 버스의 종점은 어디일까 문득 궁금해져 떠나 보는 작은 일탈, 부산 여행은 그런 즐거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부산역에서 시작되는 제 여행의 첫 행선지는 언제나 광안리입니다. 첫 여행의 첫 번째 추억이 있는 곳인데다 서울에선 볼 수 없는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곳이라 언제나 이곳을 가장 먼저 찾습니다. 해운대 바닷가도 좋지만 그곳의 번쩍번쩍한 느낌보다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광안리 특유의 분위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침의 광안리는 언제나 저를 홀로 맞아줘 좋습니다.



저 멀리 바닷물에 튕긴 햇살의 반짝임과 광안대교가 보이면 크게 숨 하나를 내뱉습니다. '내가 왔어' 하면서요. 한적한 아침의 광안리는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볼 때마다 조금씩 더 멋져지는 것 같은 광안대교며 새파란 날엔 외국 해변 같은 청명함은 오히려 조금 물러나 한 눈에 최대한 많이 담는 게 더 좋을 때가 많아요. 그 때문인지 광안리 해변을 따라 카페들이 즐비합니다. 바다를 보며 커피 한 잔으로 기차 안 피로를 날리는 기분은 어느새 이 곳을 찾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2,3층짜리 카페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광안리 스타벅스는 아쉽게도 항상 사람이 많더군요.


이른 아침의 산책, 광안리

그렇게 잘 도착했다는 인사를 전하고 발길을 돌려 걷습니다. 얼굴 못 본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혹은 늙었는지 서로 확인할 시간도 없이 향하는 목적지는 해운대입니다. 무엇하러 가냐고 묻는 말에 '해운대에 가려고'라고 답합니다. 걷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부산에 왔습니다.


영화의 거리

매년 대규모 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은 어느새 영화인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천만 영화 중 상당수가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니겠죠? 광안리부터 해운대까지 가는 길이 이 영화의 거리가 생기며 매우 깨끗하고 깔끔한 길이 되었습니다. 잘 닦인 길이 제가 부산에서 느꼈던 운치를 조금 빼앗긴 했습니다만, 별 짐 없이 달려온 이 곳에서 마치 옆동네 찾아온 듯 편하게 걷기 좋습니다. 게다가 오른쪽에는 바다가, 왼쪽에는 번쩍번쩍 고층빌딩이 있으니 머지않아 이 풍경이 부산을 상징하게 될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잠시 기대 바다도 보고, 편의점 들러 목도 축이고 하다 보면 해운대에 닿을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꽤 먼 걸음이지만 도착할 때쯤 되면 묘하게 아쉽습니다. 이 좋은 걸음을 잠시나마 멈춰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아침의 해운대

해운대의 아침

광안리와 해운대. 오늘 아침 방에서 눈을 뜬 제가 점심을 먹기 전에 이 두 곳에 인사를 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실은 두 곳의 아침 풍경 모두 놓치지 않고 싶어 점심식사를 미룬 것이지만요. 광안리가 늘 제게 텅 빈 풍경으로 기억돼 이 큰 도시 부산에서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마련해줬다면 해운대는 언제나 갈매기 가득한 화려한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갈매기가 사람을 부르고, 다시 사람이 갈매기를 붙잡는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바닷가는 반드시 시골일 것이라는 어릴 적 제 생각이 생각나 웃음 짓게 됩니다.



사실 해운대에 빠지지 않고 들르는 이유는 해운대 바다보다는 해운대까지 걷는 길이 좋기 때문입니다. 늘 사람으로 가득하고 해변 앞 분위기도 어쩐지 너무 번화가인 이 곳의 풍경은 제겐 영 어색해서 오래 머물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산의 대표 번화가답게 먹을거리와 즐길거리들이 늘 가득하기도 하죠. 서울에서 보던 익숙한 이름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한 해운대 주변 풍경이 제게는 왠지 반칙 같아 아쉽지만, 이것도 사람 사는 풍경이니까요. 저는 해운대가 가진 것보다 해운대 사람들이 내어놓는 것들에 더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산을 사랑하게 만든 것들

역시 부산하면 음식 얘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바다를 인접한 도시에선 신선한 회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고 밀면과 비빔당면, 돼지국밥, 어묵 등 부산의 아프고 기쁜 역사와 함께한 소울푸드들도 이따금 떠오릅니다. 최근엔 씨앗호떡이나 이름난 베이커리, 퓨전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것도 재미있다죠. 저는 바다와 풍경을 보며 마음의 회복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여행이란 핑계로 양껏 배를 채우며 감정의 허기까지 채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산책하기 좋은 길, 길, 길

해운대 바닷가 풍경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달맞이 고개. 저 멀리 보이는 산동네는 늘 호기심의 대상으로 끝났지 선뜻 올라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1박 2일에 그쳤던 부산 여행에 뜻하지 않은 하루가 더 생기던 날, 망설임 없이 달맞이 고개를 올라 보기로 했습니다. 종종 걸음이면 곧 닿을 것 같던 달맞이는 제 바람처럼 가깝지 않았고, 늦겨울엔 볼거리조차 없었죠. 실망스레 터벅터벅 내려오던 길 왼편 너머로 버려진듯한 기찻길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습니다. 산 아래, 오른편으로 바다를 끼고 걷는 폐기차 길이 주는 감흥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멋진 산책로를 그동안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 원망하며 두어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흐린 날씨였지만 바다는 파란빛을 놓지 않아주었고 바다를 따라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제법 큰 등대 두개와 마주했습니다. 걷다 보니 보게 된 이것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라 더 반갑습니다.


고은 사진미술관

언젠가 한 번은 꼭 이 곳에 가리라 다짐했습니다. 마침 제가 좋아하는 랄프 깁슨의 전시가 열렸고, 이 날은 광안리나 해운대 바다보다 이 곳을 먼저 찾았습니다. 깨끗한 갤러리는 한적하고 여유로워 좋았고 잠시 제가 부산까지 왔다는 사실이나 피곤함마저 잊고 두어 시간을 뱅뱅  돌아본 것들을 또 보고 다시 보았습니다. 네댓 번씩 작품을 본 전시는 이 날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랄프 깁슨이었을까요 아니면 여행자의 여유 때문이었을까요? 그 후 저는 서울의 여러 갤러리보다 이 미술관의 스케줄을 더 자주 확인합니다. 어쩌면 이 곳이 또 한 번 제 부산 여행의 핑곗거리가 될 테니까요.


광안리로 걷는 길

갤러리 조명보다 바깥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알아챈 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다 새까만 바다만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전까지 피겨 스케이팅이라도 하듯 즐겁게 노닐던 갤러리가 갑자기 좁고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탈출하듯 달려 나왔습니다. 하늘은 점점 붉어지고 있는데 바닷가는 꽤 멀리 있더군요.


그렇게 잠시간의 이탈 혹은 일탈을 끝내고 다시 '그 길'로 향하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풍부했습니다. 고작 한 블록 옆의 길에서 본 풍경들은 완전히 다른 도시 같았고 서울말과 부산말보다 큰 차이를 부산 안에서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날은 익숙한 길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 날 제가 만난 사람들은 저보다 몇 배는 더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더 베이 101의 야경

남들 다 가는 곳이라고 일부러 찾지 않았던 그동안의 저를 후회하게 됩니다. 이 곳에서 말이죠. 연인들에 치이고 혼자 걷는 제가 어쩐지 조금 위축되는 것 같아도 대표적인 부산 야경인 더 베이 101의 아홉 시 언저리의 경치를 보고 있으면 곧 마냥 즐거워집니다. 음식은 비싸고 맛이 없지만 한국에서 쉬 볼 수 없는 화려한 야경을 보는 티켓 값이라고 생각하면 아쉽지 않습니다. 한여름에도 이 곳만큼은 덥지 않았던 건 더위도 잊을 만큼 이 경치가 청량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 한 번은 이 야경이 저를 다시 광안리로 가지 못하게 할 것 같습니다.


다시 광안리,

부산의 밤이 나를 맞는다.

광안리의 밤

떨어지는 해가 부딪힐 산이며 빌딩들이 없어서일까요, 바닷가에선 유난히 해가 빨리 떨어집니다. 일몰은 광안리 바닷가에 앉아 한가로이 감상하려고 했는데 늘 이렇게 지각이에요. 새까매진 바닷물에 비친 것들을 보면 한적한 광안리가 외투를 벗어제 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아까보다 부쩍 상기되어 있네요.



광안리부터 해운대까지. 그렇게 이 짧은 길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치 광안대교 어딘가에 제 발목에 맨 끈이 단단히 묶여있는 것 같습니다. 컴퍼스처럼 이 길을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걸 보니까요. 이 큰 도시 부산에 고작 일 년에 두어 번 오면서 같은 곳만 봐서야 언제쯤 부산을 알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다음 부산 여행에도 제 일정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요래 직이는 부산을 와 요렇게 문디같이 다니느냐 지만, 저는 이 길이 너무 좋은걸요.


동백섬에서 바라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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