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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07. 2015

#11 하루 종일, 하늘만, 하염없이.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필요했을 거야.

아, 눈부셔


진작 입추가 지나고 아침저녁 큰 일교차에 감기 조심하라는 예보만 반복하는 가을인데 햇살은 여전히 여름 때를 벗지 못했나 봅니다. 오른쪽 뺨을 따갑게 쪼아대는 햇살이 원망스러운 오후, 쏘아보듯 올려다본 하늘에서 묘한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길만 따라 걷던  그동안의 반복된 걸음을 되돌아보는 계기였습니다.


PM 2:00

짜증스레 쏘아본 하늘에는


외국에 비해 형편없다고 불평하던 제 머리 위로 펼쳐진 가을을 저는 애써 외면하며 지냈나 봅니다. 햇살이 뺨을 콕콕 찔러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을까 싶은 맘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쏟아지는 햇살과 마주하니 가을이 좋다 좋다 말만 들었지 이렇게 상쾌했었나 싶습니다. 왜 모르고 살았지 싶어 요 며칠 제가 무엇들을 했는지 떠올려봅니다. 특별히 더 바빴던 것도 아니었는데 가을이 이만큼이나 오는 동안 잠시 목을 젖힐 시간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니 만들지 않았습니다.



새파란 배경지 같은 가을 하늘 위에선 모든 것이 펜과 붓으로 그린 듯 선명하고 또렷합니다. 어떤 색이던지 퍽 잘 어울려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집니다. 아무 색도 알아볼 수 없는 검정 실루엣의 움직임은 똑딱 떼어지는 종이인형 같아 나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에 빠진 와중에도 저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지만 햇살이 따갑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이대로 쭉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PM 6:00

시시각각 변하는 빛깔에 눈을 떼지 못해서


그 언젠가 사랑에 빠진 순간의 느낌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발은 쉴 새 없이 움직이지만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그에 맞춰 하늘은 제가 닿은 장소보다 더 다양한 색과 형태로 저를 흔들어 놓습니다. 파랑과 검정 두 가지 뿐이라고 생각했던 하늘의 색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달라지는 이 시간엔 오롯이 이 화려한 춤에만 눈과 생각을 집중하게 됩니다. 말을 걸어오는 친구에겐 건성건성 대답을 하지만, 마음은 이미 머리 위 풍경에 빼앗겼습니다.



종일 숨어있던 차가운 가을 바람이 한순간에 몰아치는 짜릿함도 짜릿함이지만 이 시각의 하늘은 마음만 먹으면 아직 이름도 채 붙이지 못한 수백 가지 칵테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바텐더 같습니다. 시시각각 척 하고 내어놓는 것들이 형형색색 아주 멋지거든요. 그래서 이 시각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내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문득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어렵구나'라고 중얼거립니다.



PM 10:00

세상에 검은색 하늘은 없더라


소년 시절 밤하늘을 그리기 위해선 늘 검은색 크레파스를 손톱 길이만큼 써야 했고 팔이 아플 정도로 흔들어대야 했습니다. 차라리 해와 구름을 잔뜩 그려 넣어 낮을 만드는 편이 훨씬 편했죠. 아마 그때부터 저도 모르게 낮을 좋아해야 한다며 저를 구슬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제까지 제 머릿속 밤하늘은 새까만 암흑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제 기억 속의 하늘은 한 번도 검은색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맑은 날엔 흐릿하지만 밤에도 구름이 보였고 대부분의 밤은 낮보다 더 화려한 색들로 수 놓아져 있었으니까요. 넘어가는 해가 만들었고, 사람이 만든 조명으로 빛나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밤하늘을 보니 어두움과 검정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그날 밤하늘은 분명 새파란 색이었습니다.



밤이 까맣다는 생각을 버리면 우리의 하루는 몇 곱절쯤 길고 여유로워집니다. 머릿속 오늘 하루가 예닐곱 시쯤 끝난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수첩에 공짜로 몇 줄쯤 쓸만한 칸이 생기는 것이죠. 하지만 이 시간들은 어째 낮보다 금방 지납니다. 노을에 감탄한 게 조금 전인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차가운 바람에 콧물도 조금 흐르기 시작했으니까요.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 본 오후부터 시작된 이 날 하루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활기를 찾습니다.



AM 6:00

짜증으로 시작한 하루가 짜릿하게  마무리됐어


가을의 아침은 겨울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밝아오는 것은 어두워지는 것보다 더 마음을 급하게 했습니다. 낮보다 더 바쁘게 하늘을 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머리 위의 하늘을 보았고, 땅위의 것들과 만난 반쪽 하늘과 물에 비친 하늘들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종종 고개를 떨어뜨려 하늘을 볼 때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처럼 가슴이 뜁니다. 오늘 같은 여유를 언제 또 가질 수 있을까요?


오후에 시작된 하루가 아침에 끝나는 특별한 하루였습니다. 바라본 것은 하늘뿐이었고 생각한 것도, 남은 것도 없지만 마음은 한없이 즐겁습니다. 손과 발 끝이 이따금 짜릿짜릿합니다. 하루 동안 마주한 수백 가지 하늘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주워담아 간직하고 싶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하루에 몇 분, 아니 몇 번이나 하늘을 보세요?

오늘은 잠시라도 가만히 하늘은 본 적이 있었나요?

사람들은 우리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젊음이라고,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로운 세상이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어째 하루에 하늘 한 번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가, 하루 종일,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특별하지 않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하늘'을 찍은 사진들을 이렇게 반기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회복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보관함 속 수 많은 하늘 사진들을 보니 그동안 꽤나 답답했을 제 자신을 위로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길을 따라 걸었던 것이 아니라 하늘을 쫓아 달렸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다행히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조금 걷는 수고만으로 충분합니다.

창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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