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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Nov 04. 2015

#14 곡교천 따라 현충사까지, 전부 가을

당신도 가을을 열렬히 기다렸나요, 나처럼?


으레 때가 되면 오는 줄 알았던 것이
어쩌면 지금 아니면  다시없을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이름을 듣고 그를 만나기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계절의 저는 그만큼 간절했나 봅니다. 일 년의 과실이자 노력의 결실 혹은 무더위의 끝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 가을인데 막상 받아 품에 안으면 어떻게 즐겨야 할지 막막합니다. 저 역시 가을의 빛을 품기엔 거칠기 짝이 없는 회색 도시 한 구석에 앉아 우연히 이 길을 담은 사진을 보게 되었고, 며칠 후 이 곳에 닿았습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계절을 핑계로 만난.



Falling in Fall, 가을에 빠지다.

곡교천 은행나무길, 2014


마음 약한 사람은 이 곳에서 숨이 가빠질 지도 모릅니다. 새삼 '가을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혹은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었나' 하면서요. 봄 벚꽃과 가을 은행길은 아주 섬세한 예술가 같아서 하루만 늦거나 일러도 그 '절정'을 보기가 힘든데 가을 하늘이며 눈 앞에 쏟아지는 노란빛을 보니 '제때 찾아왔구나' 싶습니다. 이 공간에 머무는 몇 시간 동안 저는 족히 수만 개의 감동적인 풍경과 마주했습니다.


충남 아산에 위치한 곡교천을 따라 곧게 뻗은 이 길은 가을이면 노란색으로 빛납니다. 황금빛이란 고리타분한 표현을 쓰기 싫어도 멀리서부터 노랗게 빛나는 색이며 가을바람 한 움큼에 샤르륵 하고 흩뿌려지는 모양새가 꼭 그렇습니다. 덕분에 가을이면 전국에서 낭만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되었죠.


곡교천 은행나무길, 2014

역시나 제가 알 정도면 이미 다들 아는 유명지입니다. 점심 먹기 전 이른 시각인데도 잠시 짬을 내 산책하는 분들이며 그들의 추억을 대신 기록해주는 분들, 저처럼 가만히 지켜보고 그저 걷는 사람까지 가을 소식이 퍼지지 않은 곳이 없네요. 다행인 것은 이미 내려앉고 곧 내려앉을 노란빛이 이미 그득해 이 정도 사람으론 그 색이 탁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올 가을 아니 언젠가라도 가을 곡교천 은행나무길에 도착하게 된다면 길 중간쯤 되는 곳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하늘을 올려 보세요.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하늘 한 줌 볼 수 없이 노랗게 가린 은행 빛, 가을만이 주는 그 감흥에 취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걸음 뒤로 황금빛 가루가 흩날립니다

곡교천길, 2014


나란히 걷는 아줌마 삼총사의 뒤꿈치를 따라 흩날리는 것들, 이따금씩 아이들이  한 움큼씩 쥐고 머리 위로 날리는 것들이며 가을 바람이 제 머리 위에 올려놓는 것들이 이 곳에선 모두 한 색입니다. 어떤 것은 덩어리고 또 다른 것은 고운 가루이기도 하지만 빛은 꼭 같습니다. 흩뿌리는 모양새며 빛을 받아 반짝이는 형태가 아름다워 걸음을 멈추고 보기도 합니다.


제 걸음에도 저렇게 멋스러운 것들이 따를까 싶어 뒤를 보지만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몇 걸음 앞 아이가 알려주는 대로 발을 앞으로 차니 금빛 가루들이 날립니다. 저도 어엿한 이 가을 축제의 일원입니다. 예약 없이도 이렇게 찾아 오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가요.


이 걸음은 도대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현충사가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충청남도를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아산, 2014


가을길 끝에서 시작된 현충사의 가을

현충사, 2014


현충사를 일부러 찾지 않았으니 그저 가을이 황금길 끝에 현충사를 숨겨 놓았다고 하겠습니다. 가을이 절정에 다다른 이 날의 현충사를 도는 동안 내내 그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그 긴 가을길을 참고 끝까지 걸어온 이에게 주는 선물인 듯 이 공간에 찬 가을은 익숙한 향에 다른 맛입니다. 근데 그게 또 나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어깨를 감싸는 노란색 햇살에 고개를 들어 이렇게 화답했죠.


"별 걸 다, 오는 동안 즐거웠는걸 뭐"


현충사, 2014
현충사, 2014

곡교천 은행나무길의 색이며 향에 취해서인지 현충사의 가을 풍경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 몇 장을 보며 남 이야기 보듯 다시 느끼는 정도죠. 다음 가을엔 좀 안달이 나더라도 현충사 깊이 들어가 이 곳에서 가을을 시작해볼까요?



곁눈질로 찾은 가을의 색들


혼자이고 싶어 나선 여행에서 사람을 얻고, 휴식을 쫓아 도망치듯 떠난 여행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를 찾게 됩니다. 원하던 것과 정반대의 것을 얻으며 여행이 풍요로워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노란색을 찾아 온 이 곳에서 찾는 가을의 다양한 색 역시 지나치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이 가을의 보석입니다. 처음 만난 것이지만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고 혹은 보려 하지 않았으니 유산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눈을 간질이며 시선을 채우는 이것들이 불과 몇 달 전까지 어떤 색이었을까 그리고 곧 어떤 색이 될까 생각해보면 가을에 있으면서도 가을이 간절해집니다. 가장 많은 색을 가지면서 또 그것을 아낌없이 우리 앞에 뿌리는 가을의 너그러움을 저는 이 길을 걸으며 만끽했습니다.



아마도 계절이 기다렸을 거예요

우리보다 먼저, 아마도 맹렬하게

곡교천길, 2014


샤륵샤륵 낙엽을 밟고 또 차며 계속 걷습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끝없이 뻗은 이 황금색 길이 걸어보니 너무 짧아 이 끝에서 저 끝을 서너 번 가로지릅니다. 그러는 동안 몇몇 나무와는 친구가 되었고 찐빵 모자 쓴 사진가 아저씨며 인심 좋은 엿장수 아주머니와는 눈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걷고 나니 일 년 내 미뤄둔 가을 숙제를 마친 양 맘이 가볍습니다.


문득 가을이면 우리가 떨어진 낙엽을 찾아 밟는 것인지 계절이 걸음 닿을 곳에 미리 뿌려두는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당연한 줄 알았던 것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영 어렵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다 이게 얼마만에 한 질문이지 하며 웃습니다. 두어 시간 동안 저는 아무 생각이나 걱정 없이 황금빛 가을길을 걸었네요.


아무래도 가을은 이렇게 즐겨야 하나 봅니다.


곡교천 은행나무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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