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가을을 열렬히 기다렸나요, 나처럼?
으레 때가 되면 오는 줄 알았던 것이
어쩌면 지금 아니면 다시없을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이름을 듣고 그를 만나기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계절의 저는 그만큼 간절했나 봅니다. 일 년의 과실이자 노력의 결실 혹은 무더위의 끝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 가을인데 막상 받아 품에 안으면 어떻게 즐겨야 할지 막막합니다. 저 역시 가을의 빛을 품기엔 거칠기 짝이 없는 회색 도시 한 구석에 앉아 우연히 이 길을 담은 사진을 보게 되었고, 며칠 후 이 곳에 닿았습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계절을 핑계로 만난.
마음 약한 사람은 이 곳에서 숨이 가빠질 지도 모릅니다. 새삼 '가을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혹은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었나' 하면서요. 봄 벚꽃과 가을 은행길은 아주 섬세한 예술가 같아서 하루만 늦거나 일러도 그 '절정'을 보기가 힘든데 가을 하늘이며 눈 앞에 쏟아지는 노란빛을 보니 '제때 찾아왔구나' 싶습니다. 이 공간에 머무는 몇 시간 동안 저는 족히 수만 개의 감동적인 풍경과 마주했습니다.
충남 아산에 위치한 곡교천을 따라 곧게 뻗은 이 길은 가을이면 노란색으로 빛납니다. 황금빛이란 고리타분한 표현을 쓰기 싫어도 멀리서부터 노랗게 빛나는 색이며 가을바람 한 움큼에 샤르륵 하고 흩뿌려지는 모양새가 꼭 그렇습니다. 덕분에 가을이면 전국에서 낭만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되었죠.
역시나 제가 알 정도면 이미 다들 아는 유명지입니다. 점심 먹기 전 이른 시각인데도 잠시 짬을 내 산책하는 분들이며 그들의 추억을 대신 기록해주는 분들, 저처럼 가만히 지켜보고 그저 걷는 사람까지 가을 소식이 퍼지지 않은 곳이 없네요. 다행인 것은 이미 내려앉고 곧 내려앉을 노란빛이 이미 그득해 이 정도 사람으론 그 색이 탁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올 가을 아니 언젠가라도 가을 곡교천 은행나무길에 도착하게 된다면 길 중간쯤 되는 곳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하늘을 올려 보세요.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하늘 한 줌 볼 수 없이 노랗게 가린 은행 빛, 가을만이 주는 그 감흥에 취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나란히 걷는 아줌마 삼총사의 뒤꿈치를 따라 흩날리는 것들, 이따금씩 아이들이 한 움큼씩 쥐고 머리 위로 날리는 것들이며 가을 바람이 제 머리 위에 올려놓는 것들이 이 곳에선 모두 한 색입니다. 어떤 것은 덩어리고 또 다른 것은 고운 가루이기도 하지만 빛은 꼭 같습니다. 흩뿌리는 모양새며 빛을 받아 반짝이는 형태가 아름다워 걸음을 멈추고 보기도 합니다.
제 걸음에도 저렇게 멋스러운 것들이 따를까 싶어 뒤를 보지만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몇 걸음 앞 아이가 알려주는 대로 발을 앞으로 차니 금빛 가루들이 날립니다. 저도 어엿한 이 가을 축제의 일원입니다. 예약 없이도 이렇게 찾아 오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가요.
이 걸음은 도대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현충사가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충청남도를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현충사를 일부러 찾지 않았으니 그저 가을이 황금길 끝에 현충사를 숨겨 놓았다고 하겠습니다. 가을이 절정에 다다른 이 날의 현충사를 도는 동안 내내 그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그 긴 가을길을 참고 끝까지 걸어온 이에게 주는 선물인 듯 이 공간에 찬 가을은 익숙한 향에 다른 맛입니다. 근데 그게 또 나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어깨를 감싸는 노란색 햇살에 고개를 들어 이렇게 화답했죠.
"별 걸 다, 오는 동안 즐거웠는걸 뭐"
곡교천 은행나무길의 색이며 향에 취해서인지 현충사의 가을 풍경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 몇 장을 보며 남 이야기 보듯 다시 느끼는 정도죠. 다음 가을엔 좀 안달이 나더라도 현충사 깊이 들어가 이 곳에서 가을을 시작해볼까요?
혼자이고 싶어 나선 여행에서 사람을 얻고, 휴식을 쫓아 도망치듯 떠난 여행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를 찾게 됩니다. 원하던 것과 정반대의 것을 얻으며 여행이 풍요로워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노란색을 찾아 온 이 곳에서 찾는 가을의 다양한 색 역시 지나치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이 가을의 보석입니다. 처음 만난 것이지만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고 혹은 보려 하지 않았으니 유산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눈을 간질이며 시선을 채우는 이것들이 불과 몇 달 전까지 어떤 색이었을까 그리고 곧 어떤 색이 될까 생각해보면 가을에 있으면서도 가을이 간절해집니다. 가장 많은 색을 가지면서 또 그것을 아낌없이 우리 앞에 뿌리는 가을의 너그러움을 저는 이 길을 걸으며 만끽했습니다.
샤륵샤륵 낙엽을 밟고 또 차며 계속 걷습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끝없이 뻗은 이 황금색 길이 걸어보니 너무 짧아 이 끝에서 저 끝을 서너 번 가로지릅니다. 그러는 동안 몇몇 나무와는 친구가 되었고 찐빵 모자 쓴 사진가 아저씨며 인심 좋은 엿장수 아주머니와는 눈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걷고 나니 일 년 내 미뤄둔 가을 숙제를 마친 양 맘이 가볍습니다.
문득 가을이면 우리가 떨어진 낙엽을 찾아 밟는 것인지 계절이 걸음 닿을 곳에 미리 뿌려두는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당연한 줄 알았던 것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영 어렵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다 이게 얼마만에 한 질문이지 하며 웃습니다. 두어 시간 동안 저는 아무 생각이나 걱정 없이 황금빛 가을길을 걸었네요.
아무래도 가을은 이렇게 즐겨야 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