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일기亡命日記 9

-소요유

by 우인

망명일기 9 - 소요유逍遙遊


너는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있었어.

너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어.

너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

너는 빨간 립스틱을 발랐어.

너를 소요산 가는 열차에서 만났어.

너는 수줍은 듯 미소 짓고 있었지.

너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어.

너의 친구도 예뻤지만 너가 더 예뻤어.

너는 나보다 세 살 위였어.

너는 스물 셋, 나는 스무살.

세상이 그렇고 그렇다고 느끼던 그런 시절이었어.


별다른 열정도 없고

세상은 무상하다고 주문처럼 외우던 시절이었어.

가을이었을거야. 9월 정도.

동두천역에서 내려 소요산으로 올라가는 길,

세상에, 하이힐을 신고 山을 오르다니!

나랑 내 친구는 무작정 너와 친구를 따라 갔지.

그냥 이유 없이 오르다 보니 둘을 쫓아갔고

자재암에도 가고 또 소요산을 올랐어.


내 친구랑 나는 너희 둘에게 한마디도 말을 걸지 못했고

어느덧 오후 네시, 아니 다섯시였나?

너희 둘이 산을 내려가고 우리도 본능적으로 따랐지.

뭐,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어.

그냥 너의 뒷태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거야.

오동통한 너가 좋았어.

하얀 얼굴도.

그렇게 계속 산을 내려 갔고

어느 순간 역 가까이 간 지점에서

너의 친구가 휘이익 몸을 돌렸지.

그리곤 우리쪽으로 다가 오더군.

우리는 멈칫멈칫 멈추고.

너 친구가 더 적극적인 성격이었어.


왜, 계속 따라오냐고 묻더군.

우물쭈물 말을 못했지.

아마 얼굴도 빠알게 졌을거야.

뭔, 이유가 있겠어.

예쁜 여자애들 둘을 젊고 미숙한 남자애 둘이

그냥 뒤따라 간 것일뿐, 뭐라고 할 말이 없지.

여자가 먼저 제안을 하더군,

스무고개를 해서 자기들 이름을 알아 맞히면

자기네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더군.

우리야 당연히 오케이지.


이름이야 또 내 관심사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동두천역으로 가는 동안 스무고개 중 한 열두고개 쯤인가

내가 두 명 다 이름을 맞추었지.

너는 웃기만 했어.

네 친구가 거의 얘기하고.

아마 명동까지 왔을거야.


삼계탕을 사겠다고 약속했지만 삼양라면에 계란하나 넣은 것,

이 걸 삼계탕이라고 우기더군.

뭐, 삼계탕이든 라면이든 뭔 관계가 있겠어.

너의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꿈결같은데...

너는 참 얼굴이 하얗더라.

말은 너의 친구가 많이 했고

너는 거의 말을 안했어.


라면을 먹고

아마 맥주집인가? 아님 막걸리집인가?

아마 맥주집이었을거야.

젊은 남녀가 저녁만 먹고 헤어지기가 안타까웠나봐.

술도 네 친구가 샀지.

그 때 둘 다 우리보다 세 살이 위인걸 알았고

다행히 내 친구는 말 많은 너 친구를 좋아했고

나는 말없는 너를 좋아했어.


그러다 별을 보러 남산을 올라갔던 거 같아.

아마 늦었을거야.

왜 별을 보고 싶어했는 지는 몰라.

나야 더 오래 너랑 있을 수 있으니 좋았지.

그 당시엔 통금이 있었으니.

별만 보고 서로 헤어 졌던거 같아.


그리고 몇 번 만나고

너의 친구와 내 친구는 계속 만나고

난 너의 친구로 부터 너의 얘기를 들었지.


미국으로 시집갔다고.

재미동포랑 결혼 했다고.

하긴 너의 미모면 미국에 가고도 남았지.


난 그 후 휴학을 했고,

너 때문은 아니야. 이 학기 내내 인생에 대해 고민했었거든.

사는 방법에 대해.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

삶에 대해 답이 없었거든.

山에 가려고 휴학은 했는데 그도 원활치 못했고

그리고 군대를 갔어.


너는 미국에 갔고

나는 군대를 갔다.

45년 전,


너는 내 마음의 제비꽃이었고

나는 이제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

왜, 불현듯 그때 그 순간

너를 만났던 동두천행 열차안이 생생히 기억 나는지

나는 모른다.


기억 저편에 아득한 곳에 꺼내지 않고

꽁꽁 잠가둔 기억이 45년 뒤에

저절로 수면위로 떠오르는가?


너는 하얀 얼굴에

너는 부끄러운듯 웃고 있었고

너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고


너는 청바지에

너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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