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참모들 14

-14. 전속부관 이회李薈

by 우인

14. 이회李薈


이회(李薈)는 이순신장군의 큰아들이다.

자는 무백(茂白). 아버지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며,

어머니는 보성군수(寶城郡守) 방진(方震)의 딸이다.


이순신장군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회(薈), 둘째 아들이 울蔚(후에 열䓲로 개명),

셋째아들이 면(葂)이다. 서자로는 훈(薰)과 신(藎), 그리고 서익(徐益)에게 출가한 딸이 있었다.


이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아버지 이순신을 따라 전장에 나갔다.

그는 단순히 이름만 올린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군무를 수행하며 여러 해전에 참전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회가 아버지의 명을 받아 곳곳을 다니며 상황을 보고하거나, 군수 물자를 챙기는 등 참모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속부관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 진다. 본가에 서신을 전하고 본영에 공문서를 보고하는 전령의 역할을 하였다.


큰아들 이회의 역할은 정보수집 장교에 아버지의 군사적 조언자이며 심리적인 안식처 같은 존재였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에 심리적으로 많은 기여를 하였음을 곳곳의 기록에서 볼 수있다. 충무공에게 큰아들은 존재 자체로 평안함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정보다 늦으면 노심초사하고 돌아오면 안도하는 여느 아버지와 다름 없는 그런 존재였다.


난중일기의 기록

1593년(계사년) 5월 23일 夕。豚薈來傳唐官到營騎船入來云。嶺南水伯來議唐官接待事。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전하기를, 명나라 관리가 진영에 도착하여 기선(騎船)을 타고 들어왔다고 하였다. 이에 영남 수군 절도사가 와서 당나라 관리의 접대 문제를 의논하였다.


큰아들 회가 전속부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1594년 3월 25일 ○汝弼及薈。與卞存緖,申景潢來。細聞天只平安。

○여필과 큰아들 회, 변존서 신경황이 왔다. 어머님이 평안하다고 자세히 보고.

1594년(갑오년) 8월 27일 晴。右水使與諸將來射。而興陽呈酒。○見蔚書。則夫人病重云。故薈出送。

맑음. 우수사 및 장수들과 활쏘기. 흥양에서 술 전달. ○ 어머니 병세 심각, 해서 큰아들 회를 보냄.

1596년 6월 14일 朝。薈與壽元同到。聞天只平安。

아침에 큰아들 회(薈)가 수원과 함께 도착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가와의 소식은 큰아들인 회가 주로 전하였다.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안도하는 이순신장군의 모습은 곳곳에 나온다.


1595년 9월 28일 薈,蔚聞奇入來。9월 28일, 아들 회(薈), 울(蔚)이 특이한 소식을 듣고 들어옴.


큰아들 회와 울이 특수 정보수집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96년 9월21일 晴。食後. 坐射亭. 令豚輩射習. 且馳射.

맑음. 아침 식사 후 사정에 앉아 자식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또 말을 달리며 활을 쏘게 했다.

1596년 윤8월5일 晴. 往射廳. 觀兒輩馳射.

5일 기사. 맑음. 활터에 가서 자식들이 말을 달리며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충무공이 전장에서도 아들과 조카들에게 무술 훈련을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96년 윤8월9일 光陽倅行敎書肅拜。菶,薈及金大福官敎肅拜。因而與之語。 아침에 광양 현감이 교서에 대고 숙배했다. 조카 봉(菶), 아들 회(薈) 및 김대복이 관직 발령장을 받고 숙배를 올렸다. 이로 인해 그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1596년 윤8월에야 큰아들 회와 조카 봉 등이 관직 발령장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이때 정식으로 군관이 된 듯하다. 이전엔 비정규직으로 아버지의 일을 맡아 보았으나 이때서야 정식으로 군관이 된다.


1597년 9.11.陰而雨。獨坐船上。懷戀淚下。豚薈知吾情甚不平。흐리고 비가 왔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있으니 그리움에 눈물이 흘렀다. 아들 회(薈)가 내 마음이 몹시 불편한 것을 알았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한 후 백의종군하면서 수군 재건에 나선 아버지 이순신의 처절한 마음을 큰아들은 옆에서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회는 명량해전에서 아버지와 같이 사선을 넘나들며 전투를 치뤘다.

이회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1598년 노량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을 때

군관 송희립과 그 곁을 지켰다.

이회는 슬픔을 억누르고 아버지를 대신해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했다. 만약 아들이 흔들렸다면 아군 전체의 사기가 꺾였겠지만, 그는 침착하게 대처하여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우리가 오늘날 이순신 장군의 생생한 기록인『난중일기』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이회의 공이 크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가 남긴 일기와 유품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정리했다.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나 전후 공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러한 그의 숨은 공로가 인정되고, 또한 아버지 이순신이 2품직에 승진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음보(蔭補)로 임실현감에 제수되었다. 곧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이어서 첨정이 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좌승지에 추증되고, 임진왜란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엄격한 공직자였기에 아들인 이회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활쏘기 실력이 부족하면 꾸짖기도 하고, 전장에서 위험한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이회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진심으로 존경하며 끝까지 효심과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


후대의 학자 성해응은 연경재전서 [督府忠義傳]에서 이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李薈。舜臣長子。戊戌舜臣擊破泗川賊義弘,南海賊調信。賊退入觀音浦。明日舜臣援桴先登。賊伏於船尾。欑銃而放。齊向舜臣。舜臣中丸。急令將佐與薈使不發喪。督戰如故。薈鳴皷揮旗。日未午。賊投水死者可計。斬首九百餘級。賊皆遁。邊徼遂淸。甲辰除薈任宲縣監。以淸簡名。

이희(李薈)는 순신(舜臣)의 장자였다. 무술년(戊戌년)에 순신이 사천(泗川)의 적 의홍(義弘)을 격파하고 남해(南海)의 적 조신(調信)을 무찔렀다. 적들은 관음포(觀音浦)로 후퇴하였다. 다음 날 순신이 배를 보내 선봉으로 상륙하였으나, 적들이 배 뒤쪽에 매복해 있었다. 순신은 화승총을 발사했지만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즉시 장수들에게 명하여 장례를 치르지 말고 전투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이회는 북을 치며 깃발을 휘두르며 싸웠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적들은 물에 뛰어들어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고, 참수한 적만도 900여 명에 달하였다. 나머지 적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리하여 국경 일대가 평정되었다. 갑진년(甲辰년)에 이회는 임실현감으로 임명되었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충무공의 아들답게 아버지에 누가 되지 않게 모범적으로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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