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군수를 조사해 보니
가평군수를 조사해 보니
1. 왜 목민관인가?
조선시대에 목민관(牧民官)은 그 지역 백성들의 삶을 좌우했다.
수령(守令)은 행정, 사법, 군사의 전권(全權)을 행사하므로 그 지역의 작은 왕이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어떤 사람이 수령으로 오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누가 오는가에 따라 교육이 진흥되고, 삶의 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선시대 국왕은 아무리 일정이 바쁘더라도 수령(守令)이 임지로 가기 전에 직접 대면하여 수령칠사를 질문하곤 하였다.
수령칠사(守令七事)란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을 뜻하는데, 첫째, 농상(農桑)을 진흥하고, 둘째 호구(戶口)를 늘리고, 셋째 학교를 일으키고, 넷째 군정(軍政)을 잘하고, 다섯째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여섯째 사송(詞訟)을 잘 처리하고, 일곱째 간사하고 교활하지 않게 하는 것을 이른다.
그만큼 민생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지방관이었다.
이 제도는 아마 예종대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왕에 오른 예종을 대신해 정희왕후 尹氏가 자기 집안 사람들을 봐주기 위해 자격이 안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벼슬을 시키고 수준미달의 사람들이 지방에 가서 문제를 일으키자, 예종이 지방관이 임지로 가기 전에 직접 체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2. 어떻게 자료를 찾았나?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승정원일기, 그밖에 개인 문집중에 가평군수를 역임한 인물들을 어렵게 찾았다. 개인 문집에 나온 인물들은 연대가 정확하지 않아 언제 부임하고 언제 이임했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3. 가평군수의 통계
가평군수를 역임한 총 176명의 인물을 찾았다.
가평은 초기에는 현감이었는데, 중종조에 중종반정으로 왕에 오른 왕이 자기 태를 봉안한 곳이 가평이라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가평군수를 역임한 인물의 대부분이 文科(문과) 보다는 蔭敍(음서) 혹은 武科(무과)출신이라 중앙정부에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대부분이 가평군수를 끝으로 관직을 끝낸 경우가 많아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가 정리 하라는 자리로 보여진다.
文科(문과)출신은 176명중 30명으로 17% 이고, 武科(무과)출신은 2명으로 1.1%, 나머지는 모두 蔭敍(음서) 출신임.
그렇다고 아주 악질적인 탐관오리(貪官汚吏)도 거의 없어 보임.
결론적으로 가평의 牧民官(목민관)은 대부분 蔭職(음직)으로 크게 현달한 분도 없고 무난하게 가평에서 관직생활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여짐.
가평군수를 역임한 분들 중에 그래도 눈에 띄는 인물을 보자면
중종조(中宗朝)에
이희보(李希輔) 文科, 대사성(정3품)에 이름.
宣祖조에
한호(韓濩) 蔭, 호는 석봉(石峯), 그후 흡곡현령(종5품)
仁祖조에
유백증(俞伯曾) 文科, 이조참판, 대사헌, 贈영의정, 시호는 충경(忠景)
이안눌(李安訥) 文科, 예조판서, 贈좌찬성, 시호는 문혜(文惠)
肅宗조에
김석연(金錫衍)이란 분이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후에 형조판서까지 승진, 시호는 정희(貞僖)
이광하(李光夏) 文科, 한성판윤 贈좌찬성, 시호는 정익(貞翼)
正祖조에
박종갑(朴宗甲) 文科, 형조판서, 文貞
황승원(黃昇源) 文科, 이조판서, 文獻
4. 결론
가평군수들은 탐관오리는 드물었고 중앙에 가서 현달한 인물도 드물고 대부분 조용히 왔다가 은퇴한 경우로 보인다.
그러니 가평군민들은 탐학을 일삼는 수령보다는 가평에서 마무리 하려는 어찌 보면 무색무취의 그런 목민관들로 인해 순탄한 삶을 영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평에서 가렴주구로 착취해 중앙에 연줄을 대려는 인물도 드물었고, 군세가 작은 편에 속해 중앙정부에서도 그리 중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