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일기 11
나의 사랑, 나의 전투기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한 번 날아 보냐고,
기지에 착륙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지상을 떠돌다 이곳에 머문지 몇 해인가.
이곳에서의 안온한 삶은 망명일기를 쓸 생각을
아예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가끔 푸른 하늘을 날고있는 정찰기를 발견할 때면
나는 전투기를 타고 날아가는 꿈을 꾸지만
그것도 곧 야간비행을 떠나 귀환하지 못한
생 떽쥐베리 생각에 금방 시들해지곤 했다.
나는 전투기 조종사다.
훈련을 끝내고 은빛 날개가 반짝이는 내 愛機 앞에서
나는 캔디에 나오는 스테아처럼
"끝없이 지는 저녁 놀을 보여 주고 싶었어"라는
대사를 주문처럼 외우곤 했었다.
그러다 나의 기지를 잃어 버리고 하늘을 떠돈지 10년,
정말 많이 떠돌아 다녔다.
얼마나 많은 하늘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비행기와 만나 교전하여
격추시키고, 상처받고, 그리고 불시착하기도 했던가.
물로 그 전에도 3년을 외형으로만 기지 소속이지 아무런 정비사도 없고
급유도 못 받고 다른 기지에서 구걸해서 살곤 했었다.
그러니 거의 13년을 떠돌다 정착한 기지에 얼마나 애착이 있겠는가.
이렇게 살다보니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나의 본능은
거의 퇴화된 것을 느낀다.
이제 가끔씩 나의 愛機 "우인호"에 다가갈 때가 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이 마구 꿈틀대지만
그래도 항상 그 욕망이 안온한 삶에 지고 만다.
가끔씩 옛 동료와 주고 받는 메시지에서 그 친구의 빛나는 전과를 확인한다.
아직도 하늘을 떠돌아 다니며 각종 비행기를 사냥하며
그 쾌감을 즐기는 녀석이 부럽다.
어떤 녀석은 기지에 소속 되고도 아무도 몰래
야간비행을 나가 닥치는 대로 격추시킨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것을 듣고 있노라니
내 양다리는 불끈불끈 선다.
최근 전투기 조종사의 본능을 일깨우는
날렵한 무스탕을 발견했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두근두근!
무스탕이 지나간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숨겨졌던 본능이 일깨워 놓은 깊은 여운을 즐긴다.
붉은 색 립스틱으로 비행기 기수에 그린 것 같은
"단정한 난초"호를 보며 숨겨 졌던 욕망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낀다.
이 위험한 비행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
하루종일 그 무스탕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난초호가 내 마음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제는 잊혀져간 희미한 사랑의 기억까지 떠오른다.
홍대 앞 카페, 양수리, 지리산, 삼척, 안면도,
많은 곳의 기억이 흐려져 가는 이 때,
빨강 무스탕이 모든 것을 되살려 낸다.
정처없이 떠돌며 무수히 전투기와 교전을 하고
다치고, 아팠지만 자유로왔던 그 시절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디에도 도달할 수 있었던 그 때,
내리고 싶었지만 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 때의 자유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래도 무스탕은 80년대식 최신형,
나의 구형 전투기로는 교전은 무리다.
언감생심 어찌 붙어볼 것인가?
그래도 그 강렬한 욕구를 억누를 길이 없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을
억울하게 후회하지는 않기 위하여
전투기를 발진해 볼까?
안온한 삶을 일깨우는 본능이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초조감도 있고
오래 몽롱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회한등
복합적인 감정이다.
하늘늘 나니는 수많은 비행기들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 수송기, 여객기, 급유기등등
그동안은 보아도 못본 척, 곁는질로 보던
비행기들이 선명하게 하늘을 수놓으며 지나간다.
좁은 반평짜리 전투기 조종석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하였고
하늘을 나니는 쾌감만큼 짜릿한 즐거움이 있던가!
나의 愛機 "우인호" 앞에 선명히 새겨진 내가 격추시킨 비행기의 로고,
열기가 넘는가?
누구는 수십, 수백기씩 새져져 있는데
나는 겨우 열 손가락을 채우기 급급하다니.
기다려라, 무스탕 "난초호"여,
나의 마지막 출격이 있을지도 모르느니,
아, 지루한 일상이여, 안온한 삶이여,
끝없는 심연 속으로 끌려 갈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