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사도첨사 김완
사도첨사 金浣
김완 장군은 1546년(명종 1)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입니다. 영천 지역에 뿌리를 내린 명망 있는 무반 가문이었습니다.
관직 입문
1577년(선조 10) 별시 무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나갔습니다. 이후 선전관 등 요직을 거치며 무관으로서의 자질을 닦았습니다.
전란의 서막
임진왜란 발생 전인 1589년, 전라좌수영 소속의 사도 첨절제사(蛇渡僉使)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부임지에서 성곽을 수축하고 병기를 정비하는 등 철저히 대비하여 관찰사의 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란과 포로 생활
임진왜란 7년 내내 이순신 장군의 핵심 장수로 활약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하며 일본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탈출과 귀환
일본으로 압송된 그는 굴복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1598년 탈출에 성공, 9개월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말년
전후 함안군수 등을 지내며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에 힘쓰다 1607년 고향 영천에서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 이순신과의 만남과 이순신의 평가
만남의 배경
김완은 이순신 장군이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부터 이미 전라좌수영 산하의 사도첨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순신이 부임했을 때 그를 보필하며 전란을 준비한 '준비된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평가와 신뢰
『난중일기』와 장계(見乃梁破倭兵狀)를 보면 이순신이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잘 드러납니다.
핵심 참모
이순신은 김완을 주로 척후장(斥候將)이나 중위장(中衛將)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는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음을 의미합니다.
공정하고 용맹한 장수
이순신은 견내량 해전(한산도 대첩) 후 올린 장계에서 "사도첨사 김완은 대선 1척을 온전히 포획하고 왜장과 왜군 16급을 베었다"고 기록하며 그의 전공을 구체적으로 명시했습니다.
인격적 신뢰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여 통제사 자리에 올랐을 때, 다른 장수들은 사직하거나 반발했지만 김완은 군무의 연속성을 위해 남아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순신은 이후 다시 복직했을 때도 김완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일기 속의 교류
『난중일기』에는 김완과 함께 활을 쏘거나(射帿), 군사 문제를 논의하고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상관과 부하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3.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상과 주요 해전 성과
김완은 임진왜란의 주요 승전 현장에 항상 이순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해전명 역할 성과 및 활약상
옥포·당포 해전 우척후장(右斥候將) 적의 동태를 살피며 함대의 눈 역할을 수행함.
당항포 해전 중위장 적선 1척을 온전히 포획(全捕). 이 공로로 '절충장군'으로 승진함.
한산도 대첩 척후장/중위장 학익진의 중심에서 적 대선 1척을 격파하고 왜장 포함 16급을 참수함. 부산포 해전 척후장 적의 본진을 타격하는 최전방에서 활약함.
칠천량 해전 조방장(助防將) 원균 지휘하의 패전 속에서도 끝까지 항전하다가 바다에 투신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구조(?)되어 포로로 잡힘.
특히 견내량 파왜병장에 따르면, 그는 적의 대형 선박을 직접 타격하여 포획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부하들을 독려하여 전공을 세우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4. 전후 행적 및 관직
김완 장군의 진면목은 포로 생활 이후의 행적에서 더욱 빛납니다.
4-1. 압송 경로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가 된 김완은 안골포 왜적 본부를 거쳐 일본의 사쓰마(薩摩, 현재의 가고시마 현) 지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4-2. 일본에서의 삶
그는 일본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으며, 한문 실력이 뛰어났기에 일본 승려나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며 그들의 정세와 지형을 면밀히 파악했습니다. 그는 낮에는 순종하는 척하며 밤에는 북극성을 보며 조선으로 돌아갈 방향과 거리를 계산했습니다.
4-3. 결사항전의 탈출 (1598년 1월 ~ 4월)
김완 장군의 탈출은 철저한 준비와 대담한 실행의 결과였습니다.
① 탈출의 시작: 사쓰마 항구 (1598년 1월 29일)
깊은 밤, 김완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포구에 매어 있던 작은 어선(漁船) 한 척을 탈취했습니다. 혼자서는 배를 몰기 어려워 함께 포로로 잡혀 있던 조선인 몇 명과 힘을 합쳐 망망대해로 나섰습니다.
② 해상 표류와 죽음의 고비
항로: 사쓰마를 떠나 북서쪽(조선 방향)으로 노를 저었으나, 거친 파도와 역풍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표류: 며칠 동안 식량과 물도 없이 바다 위를 떠돌았으며, 일본 군선에 발각될 위기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어도 고국 바다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오직 북쪽만을 향해 배를 몰았습니다.
③ 첫 상륙: 다대포(多大浦) 도착 (1598년 4월 18일)
탈출한 지 무려 80여 일 만에 그가 탄 작은 배가 경상도 다대포(현재 부산 사하구) 인근 해안에 닿았습니다. 당시 부산 일대는 여전히 왜군이 점령하거나 출몰하던 위험 지역이었으나, 그는 목숨을 걸고 육지에 내렸습니다.
④ 부산포 도착과 아군 합류 (4월 19일~29일)
다대포에서 몸을 추스른 뒤, 이튿날 부산포 근처에서 조선 수군 및 의병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후 양산(梁山)으로 이동하여 당시 양산 군수 박응창(朴應昌)을 만나 자신이 사도첨사 김완임을 밝히고 그간의 사정을 보고했습니다.
4-4. 귀환의 의미와 국가적 환대
김완 장군이 단순히 몸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일본 내부의 정세(풍신수길의 발병설, 왜군의 철수 계획 등)를 상세히 파악해 돌아왔기 때문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해동소무(海東蘇武)
한나라의 소무가 흉노에 잡혀갔다 19년 만에 절개를 지키고 돌아온 것에 비유하여, 선조는 그에게 '해동소무'라는 어필과 호를 하사했습니다. 이는 조선 무인으로서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습니다.
함안군수 부임
귀환 후 선조는 그의 충절을 가련히 여겨 함안군수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함안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고 부상병들을 치료하며 행정가로서의 자질도 보여주었습니다.
수군 복귀 및 말년
이후 다시 수군으로 돌아와 한산도 주사방장(舟師防將) 등의 직무를 수행하며 남해안 방어에 헌신하다가 1607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5. 사후 상훈과 추증
김완 장군은 사후에도 그 충절과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습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606년(선조 39),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주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동린각(東麟閣)
고향인 경북 영천시 임고면에 그를 기리는 사당인 동린각이 세워졌습니다. 이곳에는 특이하게도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두 장군의 깊은 신뢰 관계와 공동의 업적을 상징합니다.
해소실기(海蘇實記):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일본 탈출기, 전공 등을 기록한 『해소실기』 3권 1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