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서학에 열광하였을까(1부)

-남종삼등 고위 관료를 중심으로

by 우인

십 여년 전에 남종삼성인 탄생 200주년 되던 해에 기획한 다큐 2부작이 었는데, 끝내 제작은 불발 되어 그냥 갖고 있던 자료들이다. 서학이 들어 오고 평민이나 천민이 열광한 이유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양반들하고 같이 겸상을 하니 그 자체가 천국 아니었을까? 그러나 기득권 층 그 중에서도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정3품 승지에 있던 남종삼성인을 비롯한 지배계충은 왜 서학에 열광하였을까가 궁금하였다. 그래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국 불발, 지료만 좀 남았다.


그들은 왜 서학에 열광하였을까(1부)

-남종삼등 고위 관료를 중심으로


프롤로그 - 103위 성인에 대하여 103위 성인에 대하여

한국에는 18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왔다.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한 첫 한국인 이승훈(베드로) 귀국하기 전에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실천하였으니 이는 교회사에 전무 후무한 일이다. 초기부터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겪어야 했고 박해는 100년 이상 계속되어 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냈다. 초기 50년간에는 중국인 사제 두 분의 짧은 사목 활동이 있었을 뿐 1836년에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할 때까지는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이 용감하고 열심한 신자 공동체를 지도하고 길러 냈었다. 이 공동체 속에서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성인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들 중 열심한 사목자였던 최초의 사제 안드레아 김대건과 훌륭한 평신도 바울로 정하상이 대표적 인물이다.

한국성인들의 신분과 직업은 아주 다양하다. 신분으로 말하면 양반, 중인, 상민 등이 골고루 섞여 있어 승지(承旨)나 선공감(繕工監)과 광흥창(廣興倉)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상업, 농업, 약국, 인쇄, 서사업(書寫業), 심지어는 짚신을 삼고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한 사람들이 많다. 집안 형편은 거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편이었으나 최경환, 김효주, 유진길, 김제준, 정화경, 김성우, 임치백 등과 같이 부유한 편의 집안도 있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따르면 聖人의 수는 6,130명 그 중 한국 성인의 수는 103명.


성인 공경의 시작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신자들의 공경을 받았던 인물은 주로 순교자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영생을 얻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됐으며, 그리스도와 지상의 교회를 중재한다고 신자들은 생각했다. 하느님 백성은 구세사의 과정에서 '많은 증인들'(히브 12,1)의 역할을 생각하게 됐고 그들을 공경하기 시작했다.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자 피로써 증언한 순교자들이 생존자들을 위해 전구한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중재자의 기능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집중됐다.

 313년 밀라노 관용령으로 박해가 사라지면서 성인 공경의 영역은 신앙의 증거자, 교리의 탁월한 수호자, 사도적 열성과 자선 및 복음정신이 뛰어난 자, 참회와 엄격성으로 신자로서 모범적 삶을 영위한 자 등으로 확대됐다. 6~10세기 성인으로 숭배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나며, 처음에는 지방 주교가, 후에는 교황이 최고 권위를 가지고 이를 인가하는 관습이 생겼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4년 시성을 위한 합법적 조사방식을 책정했으며 교황 식스토 5세는 1588년 시성을 위한 교황청 업무를 유기적으로 분할했다. 특히 이를 전담할 부서를 설립했으며, 현재는 시성성에서 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면 시성은 어떤 과정으로 이뤄질까. 후보자들에게 세 가지 칭호가 주어진다.

우선 '하느님의 종'으로 시성을 위해 조사된 그의 삶과 덕행이 신앙의 모범이 된다면 이 칭호를 받는다. 두 번째는 '복자'로 적어도 두 개의 본질적인 기적 사실이 있는 '하느님의 종'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셋째는 '성인'이다. 시성 과정을 모두 마친 복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복자의 전구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보고되고 심사를 마치면 시성이 결정된다.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엄숙한 시성식이 열리고 교황은 시성선언을 통해 그 대상자가 영원한 광명 속에 있으며, 세계교회는 그에게 성인에게 합당한 공적 공경을 바칠 것을 명하게 된다.

 성인 반열에 오른 이들은 △성인 명단에 이름 기록과 공적 공경 △교회의 공적 기도에서 성인에게 탄원 △성인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해 교회를 봉헌 △미사와 성무일도 봉헌 △축일 지정 △공적인 유해 공경 등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한국에서는 1984년 한국 순교복자 103위가 내한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는데, 아비뇽 교황 시대를 제외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 밖에서 진행된 시성식이다.


병인박해의 원인과 전개과정해의 원인과 전

발생 1866년 종결 1873년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1866년 2월베르뇌를 선두로 홍봉주·남종삼·김면호는 물론 정의배(丁義培)·전장운(全長雲)·최형(崔炯) 등 대표적 교인들과 다른 수천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이 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남종삼은 누구인가?종삼은 누구인가?

헌종(憲宗) 4년(1838) 무술(戊戌) 정시(庭試) 병과(丙科) 1위(4/11) 문과 급제

1817년(순조 17)∼1866년(고종 3). 세례명 요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 또는 중재(重齋).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백부인 남상교(南相敎)의 아들로 입양하였다. 남인계의 농학자로 충주부사를 지낸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 22세 때인 1838년(헌종 4)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영해현감(寧海縣監)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承旨)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고, 고종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 당시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교를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827년(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도 컸으나, 스스로도 동전한문서학서(東傳漢文西學書)를 읽고 입교하여 한때는 베르뇌(Berneux) 주교를 자기 집에 숨겨 주는 등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남종삼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과거제도에 대하여

조선 후기 과거를 볼 수 있는 사대부의 수를 대략 10만명이라고 보았을 때, 과거 식년시(3년에 한 번씩 보는 정기시험)는 33명을 선발하였으니 1년에 11명의 문과합격자를 내었으니 합격률은 대략 11/10만명 =0.00011이다.

그러니 요즘의 국가고시보다 그리 쉽다고 볼 수 없음.

참고로, 퇴계 이황은 34세에 합격하였고 율곡 이이는 29세, 다산 정약용은 28세, 서애 유성룡은 25세, 학봉 김성일은 31세, 교산 허균은 26세, 청음 김상헌은 27세, 추사 김정희는 34세, 그러니 남종삼 성인이 22세 합격한 것을 보면 엄청난 천재형임을 알 수 있다.

무과를 보아도 이순신장군이 32세에 합격하였으니 22세 합격은 굉장히 빠른 합격이고 당시 의령 남씨는 벌열집안도 아니니 오로지 본인의 노력으로만 합격했다고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문과급제자는 대략 1만 5천명 정도 최연소자는 15세의 이건창(고종), 최고령자는 83세의 박문규(고종)이다.


남종삼이 역임한 관직 남종삼이 역임한 관직

홍문관 교리(헌종, 正五品), 초계문신(헌종 12년 8월), 사헌부 장령(철종3년 5월,正四品), 영해부사(철종 7년, 從三品), 사헌부 집의(從三品), 부사과(고종1년 3월, 從六品), 부사직(고종1년 3월, 從五品) →통정대부, 부호군(고종1년 4월, 從四品), 동부승지(고종1년 7월, 正三品 堂上官, 工曹담당), 참찬관(고종1년 7월), 부호군(고종1년 8월, 從四品), 우승지(고종1년 11월, 正三品 堂上官, 禮曹담당), 참찬관(고종1년 11월), 호조참의(고종2년 1월, 正三品 堂上官),


남종삼의 가계도 남종삼의 가계도

조선시대부터

南在(영의정 正一品, 忠景, 조선개국1등공신) 弟南 誾(참찬문하부사 正二品, 贈좌의정,剛武)

南景文(병조의랑 正四品)

南智(蔭, 좌의정 正一品, 忠簡)

南偁(수원부사 從三品)

南忭(蔭, 삭령군수 從四品)

南世健(文科, 호조참판 從二品) 丈人 李允湜(文科, 府使 從三品)

南應雲(文科, 대사헌 從二品) 丈人 辛世良

南琥(蔭, 참판 從二品)

南以信(文科, 병조참판 從二品) 丈人 丁胤福(文科,병조판서 正二品)

第 南以恭(文科, 이조판서,小北의 領袖)

南斗瞻(文科, 호조참의 正三品)

丈人1 韓應寅(文科,우의정 正一品 ,忠靖) 丈人2 金景亮

南翧(남훤)(文科, 경상도관찰사 從二品)小北 丈人 權晛(파주목사 正三品)

南益薰(文科, 예조참판 從二品)

丈人1 申自淑 丈人2 姜栢年(文科,우참찬 正二品, 贈영의정, 文貞) 小北

弟 南致熏(文科, 형조참판 從二品) 丈人 申旻

弟 南至熏(文科, 승지 正三品) 丈人 慶㝡(文科, 도승지 正三品) 小北

南紀明(蔭, 현감 從六品)

南泰憲(蔭, 송화현감 從六品)

南奎老

南履佑(통덕랑 正五品)

南尙敎(蔭, 동지돈녕부사, 從二品) 丈人 李世瓘

南鍾三(文科, 승지 正三品) 丈人1 申行權 丈人2 李象會(본관 廣州,進士, 直長)

南明熙 南揆熙


남종삼의 추국

국청의 委官

영중추부사 鄭元容 영돈령부사 金左根 의정부 영의정 趙斗淳 등

추국과정

1차 국문(고종 3년 3월 2일)

Q>스스로 삼강오륜을 저버리고 사교에 깊이 빠진 이유는?

南>“나에게 스스로 천륜을 어기는 죄를 지었다고 하시나 그것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외다. 나도 임금에 충성허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지없습니다. 그러하오니 내가 어찌하여 천륜을 어기는 죄를 짓겠습니까?”

천주교를 봉행하는 일이 결코 천륜을 어기는 일이 아니라는 護敎論을 폈다.

2차 국문(고종 3년 3월 3일)

유교적 忠孝 원리를 들어 그를 규탄하였다. 즉 왕명을 달게 받지 않ㄴ느 것은 不忠의 행위이고, 연로한 부친을 버리고 살기 위해 도만한 것은 不孝의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제가 배운 바는 하느님을 밝게 섬기는 일(昭事上帝)이었으며,또한 군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가르침(忠君孝父之學)이었습니다. 나는 진도자증(眞道自證)이라는 서학서를 이유일의 집에서 얻어 보았고, 장 주교(베르뇌)로부터 강론을 들었습니다.”

3차국문(고종 3년 3월 4일)

이날의 초점은 서양 신부들을 추적하는 일, 둘째 프랑스와 조약을 맺는다는 계책이 새로운 침략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초구지계(招寇之計)라고 뒤집어 씌우는 일, 셋째, 국법을 어기고 사악한 서적을 가까이하였으니 뉘우치고 배교하기를 타이르는 일로 집약.

답>

“이 사람은 한 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라를 위해 일(爲國之計)을 꾸몄습니다.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치려는(以蠻攻蠻) 마음을 가지고 일했을 뿐입니다.”

“진도자증은 邪書가 아니며 그것은 바른길(正道)을 밝혀 주는 책입니다. 나는 천주교를 이유일에게서 배워 그것이 정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코 배교할 수는 없습니다.”

4차국문(고종 3년 3월 5일)

5차국문(고종 3년 3월 6일)

당국이 내세운 다섯가지 죄

첫째, 국법으로 금하는 사학을 큰 소리로 외쳐 대기를 꺼리지 아니하고 예사를 자행한 죄

둘째, 천주교를 정도로 주장하여 이를 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죄

셋째, 말로는 군주와 부모를 위한다고 하나, 도망 다녀 군주를 거역하고 부모를 저버린 죄

넷째, 경흥에 나타난 러시아인의 문서가 접수되지도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을 터인데, 요사스러운 말을 함부로 터뜨려 감히 기회를 엿보아 나라를 팔고자 한 죄

다섯째, 장경일 홍봉주와 친밀하게 짜고 있으며 체포되지 않는 安哥(다블뤼 주교)가 간 곳을 알면서도 끝내 실토하지 않은 죄

A)자신이 천주교를 금지하는 줄 알면서 한 것은 잘못이지만,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도(正道)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대답.

왕명을 어기고 늙은 아버지를 돌보지 못한 것이니, 이는 임금과 부모에게 죄가 되지 않느냐고 묻자, “죄를 지었다.”고 솔직하게 대답

넷째 러시아의 침략과 관계되는 일에 관해서는 매국할 계교가 아니라, 나라를 위한 계책으로 생각하고 한 일인데, 다만 홍봉주의 말을 듣고 함부로 터뜨린 점은 결과적으로 민중을 어지럽히게 되었기에 죄를 지었다고 대답.

다섯째, 다블뤼 주교의 거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

5차심문(고종 3년 3월 6일)

남종삼에 대한 決案

“의금부(義禁府)에서, ‘죄인 남종삼(南鍾三)과 홍봉주(洪鳳周) 등의 결안(結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종삼(南鍾三)의 결안에, 「윤리 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화란(禍亂)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며 감히 딴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른바 양학(洋學)은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사악한 학문인데, 자신이 높은 관리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이를 기꺼이 전하고 익혀 오랫동안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양학은 국법(國法)에서 금지해야 하는 것인데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사교(邪敎)는 정도(正道)와 배치되는 것인데도 도리어 사교를 정도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오랑캐나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러시아〔俄羅斯〕에 변란(變亂)이 있을 것이라는 말과 프랑스〔佛浪國〕와 조약(條約)을 맺을 계책이 있다고 한 것으로 말하면, 애당초 명백하게 근거할만한 단서도 없는데 요망한 말을 만들어내서 여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外敵)을 끌어들일 음모를 하였으니, 그가 지은 죄를 따져보면 만 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모반 부도(謀叛不道)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遲晩)이라고 하였습니다.」하였고, 홍봉주(洪鳳周)의 결안에, 「본래 신유년(1801), 사도(邪徒)의 잔당으로서 대대로 악행을 저지르며 사교에 깊이 빠져 이국(異國)의 무리들과 결탁하였습니다. 멀리 강남(江南)까지 건너가 서양 사람인 장경일(張敬一)을 데리고 와서 그와 한 집에 같이 살면서 익힌 것은 사악한 서책이었으며 불러 모은 무리들은 사악한 교도들이었습니다. 러시아에 드러나지 않았던 걱정거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과 프랑스와 먼저 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말을 장경일과 주고받은 자도 그였으며 남종삼(南鍾三)을 종용한 자도 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요망한 말을 퍼뜨리고 나라를 팔아먹을 흉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반 부도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습니다.」하였습니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모두 부대 시참(不待時斬)에 해당합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년 1월 20일)

여섯 차례의 추국을 받은 남종삼은 1866년 3월 6일 결안(結案)을 받고 참수형(斬首刑)이 결정되었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斬)하는것이 원칙이었으나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 3월 7일(음력 正月21日)에 서울 서소문(西小門)밖에서 집행하게 되었다. 그의 소망대로 순교의 영예를 얻게된 남종삼은 형장으로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제 국법에 따라 죽지만 나라를 배반한일은 털끝만치도 한일이 없다. 비록 나는 죽고 또 죽을 때까지 심한 고통을 받겠지만 나에게 악의에 찬 어떤 행위를 가한다 해도 나는 내세의 영복을 위해 즐겁게 받고 참으리라』


그들은 어쩧게 서학을 처음 접했을까 그들은 어따ᅠ갛게 서학을 처음 접하였을까?

남상교는 민생에 보탬이 될 실용, 실리의 학문에 힘쓰게 되어, 선진 과학과 기술을 담은 한문 서학서를 가까이 하다가, 그것을 읽고 생각하는 가운데 천주 신앙을 깨치고 천주교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간이 마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天理이며 궁리(窮理), 거경(居敬)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유교가 천(天)을 만물의 주재자로만 보는데 의문을 느껴 왔다. 이 때 하느님이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재자임을 가르치며 인간이 의롭게 살아야 하는 까닭을 선명히 가르치고 있는 천주교를 보다뛰어난 가르침으로 받아들였고,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레명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이유일(李有一) 안당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1825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온가족이 입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南尙敎聖人은 이후 영해부사(寧海府使) 충주목사(忠州牧使) 동돈령부사(同敦寧府使)의 벼슬을 한 가선 대부(嘉善大夫)였으며 농산학자(農産學者)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이후 여러 가지 중직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고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배론에서 10리 떨어진 충청도 제천에 있는 묘재로 이사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탄교이나 어려서 종숙부인 남상교 슬하에 아들이 없자 그에게 양자로 갔다. 남상교가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충주 목사 등을 역임하게 되자 남종삼은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그가 언제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860년 무렵으로 보인다.

그가 가장 가까이 했던 한문 서학서는 “진도자증”(眞道自證, Chavagnac 신부 저술,1718년 북경에서 간행)이었다.

그는 이 책을 한양에 사는 이윤일의 집에 가서 얻어 보았고 그 내용을 가지고 베르뇌(Berneux) 주교, 다블뤼 신부등을 찾아뵙고 천주학의 오묘한 진리에 탄복해 영세를 했다. 그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신앙에만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로 유배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운다.


남종삼이 지은 천주가사 '언문 뒤푸리'남종삼이남종삼이 지은 천주가사 ‘언문 뒤푸리’

남종삼이 지은 천주가사 ‘언문 뒤푸리’

“ 가갸

가련하다 우리 인생 어언 백년 잠깐일세

고해중에 빠졌더니 구세주를 만났도다

그런 즐거움 또 있는가 바른 몸가짐 바삐 가다듬어

가득한 성총 서둘러 얻어볼까

나냐

나 같은 큰 죄인도 많은 은혜 입었네

노소 없이 길러 준 은혜 주신 분 성부일세

늦어진다 은혜 갚음 이해 계산 너무 말고

나는 듯이 갚아 볼까

다댜

복잡한 우리 인생 버려두지 마옵소서

도덕으로 제물 삼아 두는 것이 본향일세

어서 들어가세 아는 이의 말 이유 달지 말고

다 같이 가져 볼까

라랴

나 같은 죄인도 너그럽게 용서하소서

화내신 대심판에 더러운 죄악 부끄럽다

느리고 게으른 몸 이 큰 길이 넓고 평탄한데

나아갈 줄 모르는가

중략

하햐

세상사람 살펴 천주께서 내려 주심이 성총이라

넓고 넓은 끝없는 천주 은혜 만세에 전하리라

하루라도 성총 속에 힘 얻는 게 은혜이니

예배드려 감사하세


에필로그

에필로그

어느 계층, 어느 신분에 속하든,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 학식의 유무에 관계없이 천주 신앙을 깨치고, 그 가르침대로 살다가 마침내 생명마저 내걸고 순교한 성인들은 다 같이 의롭게 사신 분들로 영복을 누리고 있는 점에서 동일하다. 또한 순교하기에 앞서 세속에서 겪은 무서운 고난도 그 차이는 있을지언정,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받은 것이기에 신앙적으로 순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속적으로 편안과 영달을 누릴 수 있는 보장된 신분이면서도 스스로의 결정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 자신과 가족에게 닥쳐올 고난이 단지 그들의 육신적 고통과 죽음만이 아니라, 가문의 몰락을 자초하고 있음을 예측하면서도 스스로의 고민과 선택으로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던 성인 남종삼과 그 부친 남상교의 순교가 돋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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