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혼돈의 시대, 인간의 길을 묻다
그들은 왜 서학(西學)에 열광하였을까?
‣ 2부 - 혼돈의 시대, 인간의 길을 묻다
#1. 1779년 기해년 음력 섣달, 천진암에 모인 젊은 학자들1779년
1779년 음력 섣달, 눈 덮인 깊은 산 속 폐허가 된 한 암자에 젊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학자 권철신이 주도한 강학회에 모인 이들은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권일신, 이승훈, 그리고 소식을 전해 듣고 일백여리 눈길을 걸어 찾아 온 이벽 등 남인 시파의 젊은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여러 날 동안 밤새 촛불을 밝혀 함께 논한 것은 서학(西學), 젊은 학자들은 함께 경서를 담론하며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아는 것을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역사적 모임은 조선 후기 천주교가 이 땅에 자생적으로 뿌리내리게 되는 씨앗이 되었다.
#2. 권철신은 누구인가?
#2. 권철신은 누구인가?
1. 명문가에서 태어난 선비 (1736 ~ 1801)
권철신은 경기도 양근(현 양평)의 명문가인 안동 권씨 집안에서 1736년 태어났습니다. 자는 기명(基命), 호는 **녹암(鹿菴)**입니다.
학문적 배경: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의 제자로, 기호 남인 학맥을 잇는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명성: 그의 학문적 깊이는 매우 깊어 서양 학문(서학)뿐만 아니라 성리학에도 정통했습니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들이 그를 스승처럼 우러러보며 따랐을 정도였죠.
2. 주어사 강학회와 천주교의 접촉 (1779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1779년 겨울, 경기도 여주 **주어사(走魚寺)**에서 열린 강학회입니다.
학문에서 신앙으로: 처음에는 유교 경전을 연구하기 위해 모였으나, 이벽(李檗)이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을 읽으며 큰 충격을 받습니다.
실천적 탐구: 권철신은 단순히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천주교 교리에 따라 매일 기도를 바치고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신앙의 확산과 갈등 (1780년대 ~ 1790년대)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권철신도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을 받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남인 학자의 고뇌: 당시 천주교는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사학(邪學)'으로 몰려 탄압받기 시작했습니다.
내적 신념: 그는 조정의 압박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동생인 권일신과 함께 경기 지역 천주교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4. 신유박해와 순교 (1801년)
1801년, 순조가 즉위하고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가 일어납니다.
체포와 국문: 권철신은 남인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최후: 결국 옥중에서 고문의 여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옥사). 비록 칼을 맞아 처형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기에 교회는 이를 순교로 기립니다.
#3.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의 중요성
#3.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의 중요성
녹암 권철신이 주도하던 1779년 강학은 그 당시 참석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쓴 ‘여유당 전서’의 ‘녹암 권철신 묘지명(鹿庵權哲身墓誌銘)’의 ‘己亥冬講學于天眞庵魚寺李檗雪中夜至張燭談經(기해동강학우천진암주어사이벽설중야지장촉담경)’ 이라는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유교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광암 이벽이 참여하면서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천주교와 비교하면서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음력 주일을 준수하며 재계생활을 할 정도로 서학을 이해하였는데 이벽은 ‘천학초함’을 읽고 ‘성교요지’를 저술하였다고 ‘성교요지’ 첫 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에는 천진암 강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그 밖에 학문을 좋아하고 학구적인 여러 양반들을 데리고 함께 깊은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한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이 기쁨에 넘쳤고 또 그 유명한 사람들의 강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었다. 눈이 곳곳의 길을 덮었고, 거리도 100여 리나 되었다.
또한 샤를르 달레 신부는 그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강학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구회는 10여 일이 걸렸다.
그동안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의견을 끌어내어 한 점 한 점 토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들의 윤리서 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였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 책들은 조선 사절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실은 당시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책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연례적인 사신 행차 때에 조선 선비들이 따라가서 서양의 과학과 종교에 대해 중국인과 재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학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도 몇 가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등이었다.
중국 서적들의 어둡고 모순된 학설에 익숙한 그들은 정직하고 진리를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인지라 천주교 도리에는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위대한 무엇이 있음을 이내 어렴풋이 느꼈었다. 완전한 지식을 얻기에는 설명이 부족하였으나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하였다.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였으며 또 그 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이벽의 마음속에 보배로운 씨앗이 이렇게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는 종교에 대한 이 초보적인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고 있었으므로 그의 온 정신은 자기 교양을 보완하는데 필요한 더 많고 더 상세한 서적이 있을 북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서학의 전래와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는 한국천주교회의 시발점이다.
강학회에 참가한 사람은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이방억, 윤유일, 이존창, 갑수 등으로 초창기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며, 1783년 겨울, 이벽은 이승훈의 부친인 이동욱이 동지사행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는 것을 알고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많은 서적을 가져오게 하여 이듬해인 1784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최초로 신앙 집회를 갖음으로 한국천주교회가 창립 된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하였다”
-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안 주교 <朝鮮殉敎史備忘記> 中
#4. 이벽은 누구인가?#5. 이벽은 누구인가?
1754(영조 30)∼1785(정조 9). 조선 후기의 학자·종교인.
1. 거인의 풍모를 지닌 천재 학자
이벽은 경기도 포천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입니다.
비범한 외모와 지성: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가 매우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눈빛이 번쩍이는 호남아였다고 합니다. 동시에 경전과 역사, 천문, 수학에 능통한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습니다.
구도의 길: 기존 성리학만으로는 세상의 이치를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느낀 그는 당시 유입되던 '서학(西學)' 서적들을 탐독하며 우주의 근본 원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2. 한국 천주교의 시작: 주어사 강학 (1779년)
이벽은 권철신과 함께 주어사(또는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열었습니다.
학문을 종교로 승화: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교리서인 《천주실의》 등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자생적 신앙: 이벽은 성호 이익의 제자들에게 천주교의 타당성을 설파하며, 단순히 지식으로 머물던 서학을 실천적인 '신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3. 이승훈의 파견과 세례 (1784년)
이벽은 조선에 신부님이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북경으로 가는 동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올 것을 당부합니다.
한국 최초의 세례: 1784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이벽은 그에게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공동체 형성: 이후 이벽은 정약용 형제와 권일신 등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서울 명례방(현 명동성당 인근)에 최초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4. 을사추조적발사건과 고독한 죽음 (1785년)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다가 형조(추조)의 포졸들에게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을사추조적발사건입니다.
집안의 압박: 유교적 가풍이 엄격했던 그의 부친은 아들이 사학(천주교)에 빠진 것을 알고 자결하겠다며 강력히 꾸짖고 외출을 금지했습니다.
심화(心火)로 인한 요절: 신앙과 효도 사이에서 극심한 번민을 겪던 이벽은 결국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전염병(혹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5. 이벽 가계도
#6. 이벽 가계도(本貫 慶州)
李莒(이거)
↓
李達尊(進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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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宕(生員, 進士)
↓
李廷馨(文科二等, 이조참판 從二品) 丈人1 宋應慶
丈人2 尹鉉(文科壯元, 호조판서, 忠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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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潚(進士, 송라도찰방 從六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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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慶相(文科, 세자시강원 문학 正五品) 生父 李慶集(進士)
丈人 崔誠元(生員, 水原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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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煦(이후)(文科, 장례원판결사 正三品) 丈人 閔應協(文科, 대사헌)
丈人2 徐挺然(文科, 사헌부 掌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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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彦基(進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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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鐽(武, 兵使 從二品)
↓
李溥萬(동지중추부사 從二品)
↓
李檗 → 丈人 權�(文科, 병조판서 正二品)
兄 李格(武,도총부부총관 從二品) 第 李晳(武,좌포장 從二品)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6대조 李慶相 때문이었다. 이경상은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셨는데,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귀국할 때 선교사 아담 샬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 중 일부가 집안에 전해져왔다. 이벽은 이런 서적들을 통해 스스로 천주교를 접했던 것이다.
茶山 정약용은 그 贈李檗 시에서, 이벽을 가리켜,[,,,선생님은 만사에 있어서, 庶民이나 常民도 인간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부귀영화도 부러워하지 아니하시며, 聖賢君子의 학덕과 영웅호걸의 기백을 골고루 갖추시었으며,,,아주 어려서부터 덕을 닦는데 힘쓰시더니, 지금도 그 강개(慷慨)한 모습이 얼굴에 한결같이 들어나 늘 뵈옵게 됩니다.] 하였다.
#6. 닫힌 시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자생적 천주교 수용7. 닫힌 시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 -자생적 천"광암 이벽은 사실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린 다산 정약용을 통해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젊은 시절부터 삼십여 년에 걸쳐서 유학경전에 대한 연구서인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를 완성했는데요, 그는 여기서 이 책을 이벽의 도움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고 밝히면서 그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만일 광암 이벽이 살아 있었다면 그의 학식과 덕이 어찌 나와 비교 될수 있겠는가!'(使曠菴而尙存 其進德博學豈余比哉 - 사광암이상존 기진덕박학기여비재)"
"본문의 내용은 더 구체적입니다. 문장 곳곳에서 다산은 이 문장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광암의 문장이다', 이 뜻풀이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광암이 한 것이다(此曠菴之文 此曠菴之說)'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이벽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던 유학자임이 분명한데요,
그런 그가 왜 천주교에 빠져든 것일까요?“
1784년 봄 남한강, 이벽은 자신의 누이이자 정약용의 큰형수인 경주이씨 제사를 치룬 뒤 서울로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이벽은 이 자리에서도 천주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이 때 정약용 형제는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에 대한 이치를 듣고 정신이 아득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울에 도착한 이벽은 다산 형제에게 몇 권의 책을 권했다.
천주교에 대한 기본 안내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이었다.
천주실의는 16세기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마테오리치(1552~1610)의 저서다.
그는 동양인들에게 천주교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유학경전을 인용해서 천주교를 설명했다.
서양에서 말하는 천주(天主)는 곧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上帝)와 같다는 논리였다.
"천주교가 중국에 들어갈 때 마테오리치는 천주교와 유교를 상호 대립된 관계로 보지않고 천주교 신앙이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준다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바로 그 입장이 보유론(補儒論)인데, 바로 그 보유론적 이론을 전개한 천주실의를 이벽은 읽었고 그로 볼 때 이벽은 유학을 기초로 해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인물로 판단이 됩니다.“
- 조광 교수, 고려대 한국사학과
* 보유론(補儒論) - 천주교가 유교 이론을 보충해 준다는 논리
당시 중국에서는 서양의 학문, 즉 서학이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동양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천주교 서적뿐만 아니라 서양의 철학,
과학,수학등 과학기술서까지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서양의 학문은 폐쇄적인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당시 외국과의 유일한 접촉 수단이었던 사신을 통해서였다.
새롭게 들어온 서학은 유학만을 숭상한 조선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왔고
성호 이익(1681~1763)을 필두로 한 실학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익에게 학문이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목적을 위한 도구였고
사회제도는 개혁이 필요한 낡은 관습이었다.
*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이익은 마테오리치의 저서 등 수많은 서양인들의 책을 읽었다.
이벽은 바로 이런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모시는 남인 계열의 학풍에 속해 있었다.
"스승의 학문성이 당시 주자학풍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른바 탈주자학적인 성향이죠. 그것을 광암 이벽이 받아서 그러한 성향을 지니게 됩니다. 거기다가 이벽은 학문의 영역을 굉장히 넓게 가지려고 합니다. 주자학풍을 벗어나서 고전 전역을 한 번 연구해보자, 그리고 더 넓게는 새로 들어오는 양명학까지도 연구해보자,
그러다보니까 그 시기에 천주교라는 또 다른 신앙이 들어옵니다. 그것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연구하게 됩니다.“
- 차기진 박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성호학파 제자들 중에서도 이벽은 남달리 일찍부터 서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들에게 따로 부탁해 서학책을 구해 읽었다고도 한다.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이벽은 홀로 천진암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당대 다수 선비들이 지향했던 과거를 뒤로 한 채
기존 학문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학문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벽은 출발은 유학자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유학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학문, 새로운 학풍을 연구하는 신진 유학자로 변질을 하지요. 그러한 새로운 학풍을 쫓는 열의 때문에 천주교까지도 수용하는 여지가 생겨났단 말이죠."
- 차기진 박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천진암 계곡.
이벽이 공부하는 이곳으로 정약용 등 젊은 학자들은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기존의 사상체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을 추구했다.
그고 그 열정이 한국천주교의 싹을 틔우게 된다.
#7. 18세기 조선, 새로운 사상운동의 전개
천주교가 전파되던 18세기 조선은 변화를 향한 열망이 들끓던 시대다. 소수 양반가문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많은 몰락양반들이 발생했고, 농촌에서는 부농이 생기는 한편 영세농들이 이농을 강요당해 유민의 수가 늘어났고, 화폐제도가 활발해지면서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공고했던 신분제도의 근간이 흔들리며 각성한 민중들이 출연하기 시작했고, 이런 변화를 감지한 눈 밝은 학자들은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의 요구를 열망했다.
그리고 그 열망으로 새롭게 일어난 학문이 실학(實學)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일구어진 실학은 기존의 세계 질서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었던 남인(南人)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자 했던 실학자들은 성리학(性理學) 중심의 사회가 드러내고 있던 여러 병폐를 바로잡아 줄 새로운 사상을 갈망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적이었다. 그 서적 속에서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었고 설명되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적인 모순을 혁파할 수 있었던 사상적 대안, 그들은 운명처럼 서학(西學)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직시했던 젊은 학자들,
그들이 서학(西學)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시대의 요구와 열망이 만들어 낸 필연이었다.
#8. 최초의 조선인 세례자 이승훈
⧠ 충효(忠孝)의 시대, 아버지의 길을 버리다 - 이벽
#1784년,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은 조선인이 있었다.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왔던 28세의 이승훈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후, 프랑스 예수회 소속의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조선 천주교의 공식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 역사의 뒤, 이승훈의 벗이었던 이벽이 있었다.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아서 돌아오도록 부탁을 한 것이 바로 이벽이었다. 일찍이 서학 서를 탐독하며 스스로 진리를 깨우쳐 가던 이, 누구보다 먼저 학문적 열망을 종교적 신앙으로 변환시켰던 이, 이벽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조선 천주교 창설의 선구자다.
#9. 이승훈은 누구인가?
#1756년(영조 32)∼1801년(순조 1).
1. 북경으로 떠난 '조선의 베드로' (1783년)
이승훈은 당대 최고의 남인 학자 집안 출신이다.
1783년, 그의 아버지가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서 서양 신부들을 만나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깁니다.
최초의 세례 (1784년): 북경 북천주당에서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부는 그가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습니다.
2.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을 놓다
1784년 봄, 이승훈은 십자가, 성상, 교리서 등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신앙 공동체 결성: 그는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조선인들 스스로 신앙 공동체를 결성한 **'자생적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가회동과 명례방: 서울 명례방(현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열며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3. 고난과 배교, 그리고 재기
이승훈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명문가 선비로서 천주교 신앙을 지키는 것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배교의 아픔: 박해가 시작되자 문중의 압박과 조정의 국문에 못 이겨 여러 번 배교(신앙을 저버림)를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사 내에서는 인간적인 고뇌와 약함을 보여준 인물로도 평가받습니다.
끊임없는 회심: 하지만 그는 완전히 신앙을 떠나지 못했고, 다시 신자 공동체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4. 신유박해와 순교 (1801년)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는 천주교의 수괴(우두머리)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최후: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록 생전에 몇 차례 흔들림이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첫 단추를 끼운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10. 최초의 천주교회를 세우다
- 양반과 상민,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자리에 둘러앉다1. 최초의 천주교회를 세우다
- 양반과 상민,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자리에 둘러앉다
18세기 조선에는 세계 천주교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 벌어졌다. 단 한 명의 외국인 선교사도 들어오지 않은 조선 땅에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 중심에 이벽이 있었다.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서적과 상본, 망원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이벽은 이것을 받아들고 외딴 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했다.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 수표교(水標橋)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라 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당시 수표교에 자리 잡은 이벽의 집에서 천주학의 사상체계와 지식을 전수받게 된 학자 중에는 이후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 흑산으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 끝내 순교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한 정약종 형제도 있었다.
이 공동체는 이후 신분과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벽의 제자이고 중인계급의 한의사이자 통역관이었던 김정지의 병원 명례방이 바로 그곳이다.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만인이 모두 함께 둘러앉아 배운 것은 신앙이 된 학문 서학(西學)이었다.
#11. 정약종은 누구인가? #12. 정약종은 누구인가?
1760년(영조 36)∼1801년(순조 1).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1. 나주 정씨 가문의 셋째 아들
정약용 형제들(약현, 약전, 약종, 약용) 중 셋째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입니다.
학문적 배경: 처음에는 도교나 신선술에 관심을 가졌으나, 형제들과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를 접한 뒤 "이것이야말로 참된 진리"라고 확신하며 투신했습니다.
가족의 중심: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이 학문과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정약종은 집안 내에서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중심축 역할을 했습니다.
2. 최초의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저술
정약종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누구나 쉽게 천주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쓴 것입니다.
평등의 가치: 당시 어려운 한문으로 된 교리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으나, 그는 부녀자와 일반 백성들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한글을 선택했습니다.
논리적 설득: 이 책은 천주 존재의 증명과 내세의 상벌 등을 아주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조선 천주교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3. 평신도 회장 '명도회'의 수장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정약종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조직적 포교: 명도회는 신자들을 교육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핵심 조직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의 오른팔: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를 가까이서 보필하며 조선 교회의 체계를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4. 신유박해와 당당한 순교 (1801년)
1801년 신유박해가 터졌을 때, 그는 피신하기보다 신앙을 증거하기로 결심합니다.
황사영 백서 사건과의 연결: 그는 박해 상황을 알리는 문서들을 옮기려다 체포되었는데, 심문 과정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죽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될 때, 그는 **"땅을 내려다보며 죽는 것보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죽는 것이 낫다"**며 하늘을 향해 누운 채 칼을 받았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12. 정약종의 가계도
丁世瑞(保勝郞將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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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安景(保勝郞將公 贈司贍寺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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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衍(병조참판, 從二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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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子伋(文科, 昭格署令 從五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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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壽崗(文科, 大司憲, 兵曹參判 從二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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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玉亨(文科, 左贊成 從一品, 恭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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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應斗(文科, 左贊成 從一品, 忠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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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胤福(文科, 兵曹參判 從二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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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好善(文科, 江原道觀察使 從二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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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彦璧(文科, 司憲府持平 正五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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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時潤(文科,兵曹參議 正三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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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道泰 丁道復(文科, 左副承旨 正三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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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恒愼(進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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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志諧(通德郞, 正五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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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載遠(蔭, 晉州牧使 正三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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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鉉(進士試) 丁若銓(文科, 병조좌랑 正六品) 丁若鍾(福者) 丁若鏞(文科,형조참의 正三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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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哲祥(까를로, 福者) 丁夏祥(바오로, 聖人)
#13. 권세 높은 양반가의 자제, 천재로 촉망 받았던 그들
- 그들은 왜 앞날이 약속된 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았나13. 권세 높은 양반가의 자제, 천재로 촉망받았던 그들,
-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중용강의를 손질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써내려간 문장은 사실 전에 광암 이벽이 썼던 문장이다(此曠菴之文)”, “이 학설은 광암 이벽의 학설이다(此曠菴之說)”, “이런 해설은 광암 이벽이 했던 해석이다(此曠菴之義)” 이 외에도 정약용이 남긴 기록을 통해 이벽이 상당한 학문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문신으로 유명한 익제 이제현의 후손으로 조부와 부친이 모두 무과로 벼슬을 한 무관 집안에서 태어난 이벽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영특해 성호 이익으로부터 “장차 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벽은 무관의 길을 따르길 바라는 아버지의 원과는 달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기존 학문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학문을 추구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학풍을 쫓던 이벽은 집안 대대로 전해지던 서적을 통해 서학(西學)을 접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셨던 고조부 이경상이 귀국할 때 가져왔던 천주교 서적 중 일부가 집안에 전해져 왔던 것이다. 필연적 귀결이었고, 운명적 만남이었다. 폐쇄적 사회였던 조선에 천주교가 자생하게 된 씨앗,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름진 아버지의 땅이 보장되어 있었던 시대의 천재, 이벽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버리고 누구도 가지 않았던 척박한 길을
스스로의 의지로 걷기 시작했다.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오던 몇 권의 서적,
필연적으로 그 서적을 탐독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지성,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 없었더라면 그저 낯선 수사에 지나지 않았을 문장의 행간에서
그가 읽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14. 서학은 유학을 보완하는 학문이다(補儒論
#14. 서학은 유학을 보완하는 학문이다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고조부 이경상의 영향이 크다. 이경상은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셨는데,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귀국할 때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 중 일부가 이벽 집안에 전해져 왔고 이벽은 이런 서적들을 통해 스스로 천주교를 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학 서적은 금기가 아니었고, 이벽을 비롯한 남인학자들은 천주교가 유교의 충효 개념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5. 세례를 받고 천주교를 전파하다
#15. 세례를 받고 천주교를 전파하다
이벽이 독학으로 서학을 공부하던 1783년,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이 청나라 사행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게 되면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아 올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청나라에 도착한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북경 남당교회를 찾아가 신부들과 필담으로 교류하며 40여일 동안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마침내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는다. 이승훈은 천주교 교리서들을 함께 가지고 귀국하고, 새로운 책으로 공부를 한 이벽은 마침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와 함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이벽이 정식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조선 천주교는 신앙공동체로써의 첫발을 내딛게 되고, 본격적으로 천주교 전파에 나서게 된다. 우선 이가환에게 천주교를 소개했다. 성호 이익의 손자인 이가환은 이미 당대 최고의 천재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에 이가환이 입교하면 남인 사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이벽과 이가환, 두 사람의 토론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벽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반면, 이가환은 이익처럼 서학에는 긍적적이었지만 서교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가환은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돌아갔고 그때부터는 천주교에 관하여 다시는 입을 열지도 상관하지도 않았다. 그 뒤로 이벽은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이끌었던 정약용의 스승인 권철신과 그 동생 일신에게 천주교를 전해고 결국 입교시켰다. 그러나 정조 사후에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모두 노론 벽파에 의해 천주교 신자로 몰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 16. 조선 최초의 신학자이자 시대의 혁명가-아우구스티노 정약종
- 시대의 대안을 서학에서 찾다조선 최초의 신학자이자 시대의 혁명가, 아우구스티노 - 정약종
#16. 시대의 대안을 서학(西學)에서 찾다. 나주씨 가문 형제의 입교
슬프구나 우리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성현(聖賢)은 만리 밖에 있으니, 누가 이 몽매함을 열어 줄 것인가?
- 1782년 정약용의 시
1779년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에서 이벽과 함께 서학(西學)을 함께 논했던 정약전, 정약용 형제. 시대를 보는 혜안이 탁월했던 이들 형제의 입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 학자들은 일찍이 서학의 과학기술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여 연구해왔고,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형제 역시 이러한 학문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서학은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신앙이 되었고,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성리학이 아닌, 인간원죄설을 말하는 서학을 통해 시대의 모순과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된 것이다. 종교적 신앙을 통해 모순이 가득한 지상에 천국을 세우려 했던 학자들, 하지만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그들의 믿음은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집권층에 대한 위협이었다.
정약종은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에 성인 정하상(丁夏祥)과 정정혜(丁情惠)의 아버지이시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정약종을 두고 「천주교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에 한사람」이라고 극찬했다.
#17.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배교와 정약종의 순교
#17.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배교와 정약종의 순교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정약종은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내 순교를 택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그의 부인과 아들, 딸마저 순교해 정약종의 가문은 멸족에 이르게 된다. 형제들과 같은 배를 탔으나 끝내 홀로 저 너머의 세상으로 가게 된 정약종,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정약종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고자 했던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과 일찍이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때 도교(道敎)에 심취해 장생과 구원의 길로 나갈 방도를 찾는 등 학문적으로 방황을 하기도 했던 정약종은 둘째 형 정약전을 통해 서학을 접하게 되었고, 즉시 도교를 버리고 새로운 학문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문적 깨달음이 바로 신앙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벽의 신앙생활을 염려하기도 했던 그는 이벽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786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게 된다.
#18. 양반가의 자제 정약종, 민중의 벗이자 스승이 되다
#18. 양반가의 자제 정약종, 민중의 벗이자 스승이 되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던 정약종, 그를 둘러싼 세계는 신분의 귀천이 명확하며 남녀가 유별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서학을 통해 깨닫게 된 천주교 신앙의 세계에서 만인은 모두 천주의 자식이며, 그러기에 형제자매였고, 평등했다. 이 사상의 전환은 단지 생각을 바꿔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몸을 바꿔야 했고, 세계관이 변해야 했고, 마음의 근원이 달라져야만 했다. 정약종이 깨달음에 이른 혁명적 가치관은 시대에 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은 뒤, 정약종은 자신의 가치관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1794년 무렵부터 교리연구모임을 조직했던 정약종의 집에는 머슴 임대인과 행랑아범, 천민과 백정이 드나들며 함께 교리를 공부했던 것이다. 정약종은 가장 낮은 곳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던 이들과 기꺼이 벗이 되었고, 그들의 스승이 되었다. 정약종의 실천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뒤엎는 행보였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중국 교회의 평신도 단체를 모방해 만든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명도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던 정약종이 조선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한글로 작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책은 신도를 비롯한 많은 민중의 환영을 받으며 보급되었고, 이로 인해 천주교 신앙은 시대의 모순을 혁파할 민중 종교 운동의 양상을 띠며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었다.
정약종을 친하게 알았던 황사영은 그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 세속 사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특히 철학과 종교연구를 즐겨 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게 생각될 때는 그것을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고 그것을 밝혀 내기까지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온갖 정성을 들여 그것을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말을 이해시키는데 신기할 만큼 능숙했다. 』
# 에필로그
- 아버지의 길을 버린 이벽의 죽음, 시대의 혁명가 정약종의 순교⧠ 에필로그 ; 역사는 진보한다
- 아버지의 길을 버린 이벽의 죽음, 시대의 혁명가 정약종의 순교
아버지의 길을 버렸던 이벽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끝내 죽음을 선택했다. 1785년 “을사추조 적발사건”을 계기로 유학자들의 반(反)천주교 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이벽의 경주 이씨 문중에서도 격분을 하며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을 협박하게 되었다. 이부만은 집안의 대들보에 목을 달아 자살을 기도하고, 이벽은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앙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문중회의에 오히려 천주 공경의 필요성과 방법을 알리는 글을 짓고, 이에 분노한 이부만은 아들 이벽을 별당에 가두고 출입문에 못을 박아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방안에 좌정한 채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던 이벽은 14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둘에 벌어진 일이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801년, 형제와 함께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내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정약종은 그 해 2월26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기에 이르렀다. 형장에 도착한 후에도 형구 앞에 앉아 “당신네는 두려워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당신네는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라며 자신의 믿음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였던 정약종은 “땅을 내려다보며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며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머리를 누인 채 칼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 하나였다.
시대의 열망에 응답했던,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졌으며 두려움 없이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였던 두 학자의 죽음은 갖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천주교가 뿌리내리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혼돈의 시대, 인간의 길을 물었던 젊은 학자들이 있었다.
치열한 학문적 성찰 끝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믿음을 실천했다.
그렇게 역사는 진보했고, 세상은 변했다.
여기는 배반의 삶,
저기는 구원의 꿈,
여기를 지나 저 너머로 가면
그 너머 세상을 이끌고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김훈 소설 ‘흑산’ 中)
1. 1779년 기해년 음력 섣달, 천진암에 모인 젊은 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