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 2

- 이괄장군李适將軍

by 우인

李适


이괄,


역사 속에선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라고

짧게 기술되어 있을 테지만

내겐 좀 다른 측면으로 기억된다.


단순한 무인.

평화시에 살았다면 아주 유능한 군인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선조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데

처음엔 선전관, 태안군수, 형조좌랑, 제주목사등을 역임한 유능한 무장이었다.


내가 찾은 역사 속 짧은 기록을 보면

이괄(李适)

? ~ 1624년.조선(朝鮮) 중기의 무신(武臣).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규(白圭)이다.


선조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고 하는데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급제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처음 실록에 등장한 것은 선조32년(1599년) 선전관으로 항왜를 평산까지 추격하여 참수하여 조정으로 보내는 기록이 나온다. 계략을 써서 항왜를 잡은 것으로 보아 이괄이 단순히 무력만 쓰는 장군이 아니라 작전에도 능한 장군으로 보인다. 이 공으로 평안도 명천현감으로 오랑캐의 준동을 대비하여 부임하였다.

선조39년(1606년)에는 형조좌랑으로 부임, 중앙에서 행정업무를 쌓게 된다. 이때 조정의 문관들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40년(1607년)에는 태안군수(종4품)으로 승진한다. 무관이 군수까지 가는 경우도 많지는 않아서 무관 중에서는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이후 함경도 경성 판관, 영흥부사등 북방에서 경력을 쌓는다.

광해군 4년(1612년) 9월 18일에 조정에서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진 무사 중에 이광영(李光英)·이괄(李适)·이종일(李宗一)을 잘 키우면 병사로 삼기에 합당할 것입니다.”

할 정도로 중앙에서 임금이 이괄의 존재를 알 정도로 북방에서 유능함을 보였다.

광해8년(1616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이후 광해14년(1622년)에 북병사에 1순위로 낙점되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仁祖反政)에 가담, 작전지휘를 맡아 반정(反政)을 성공하게 했다. 후금(後金)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로 영변(寧邊)에 출진. 성책을 쌓고 국경 경비에 힘썼다.

1624년(인조(仁祖)2년) 아들 이전(李栴)이 지식층과 사귀다가 공신(功臣)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고 영변(寧邊)의 군영에 금부도사가 당도하자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功臣)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난(亂)을 일으켰다.

1만2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탁월한 작전으로 서울로 진격하자 인조(仁祖)는 공주(公州)로 피란하고 이괄(李适)은 서울을 점령하고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王)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지 이틀 뒤 무악재에서 장만(張晩)의 관군(官軍)에 참패, 이천(利川)으로 도망했으나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 등에게 목이 잘려 난(亂)은 평정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이괄

1587(선조20)~1624(인조2).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로서

대사간 이지(李猩)의 아들인 이조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에 형조좌랑(刑曹佐郞)․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역임하고 광해군14년(1622)에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변방에 부임하여 있을 때 신경진의 아우 신경유(申景裕)가 협박하다시피

권유하므로 그를 따라 상경,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 거사에 참여,

김류와 지휘권을 놓고 반목이 있었으나 반정을 성공하게 하였다.

이때 2등 공신(功臣)에 훈록되어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가

그 해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영변(寧邊)으로 부임,

인조2년(1624) 1월22일 구성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과 합세하여

군사 1만 2,000명을 동원하여 서울을 향해 진격,

도중에 교묘하게 관군(官軍)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2월9일 무혈 입성하였다.

임금이 공주(公州)로 피난감에 선조의 열째 왕자

흥안군(興安君)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11일 장만(張晩) 원수 휘하 정충신(鄭忠信) 등이 이끄는 관군과의

안현 (鞍峴:무악(毋岳)) 싸움에 참패, 이천(利川)까지 달아났다가

부하 기익헌(奇益獻)과 이수백(李守白)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는 무예뿐 아니라 글을 잘하고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김류․ 이귀(李貴) 등이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많음을 인정하고 반정의 비밀계획을 알리자 강개하여 참여하였다.

거사하던 날 부서를 나누는 등 온갖 계획을 도맡아 하였으나

훈록(勳錄)에 있어서 김류는 1등인데 그는 2등에 그침에 사람들도

억울하다 하였다.

이귀가 훈록을 결정하는 자리에서�반정하던 날 이괄의 공적이 많았다‘ 고 역설하였으나 김류의 고집으로 2등 공신에 한성 판윤이 제수되고 곧이어 평안도지방에

오랑캐의 침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하자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반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이귀에게�내가 경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하오�하고 한탄하며 공주까지 피난하였다.

일찍이 구천군(龜川君) 이수(李邈)가 이괄을 한 번 보고 상이 심히 흉하여 끝을 잘 맺지 못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는데 임금을 따라 공주까지 호종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는데 임금이 앞날을 걱정하자�괄의 흉한 상으로 미루어 오래지 않아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내가 이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중학생때

집에 있는 "한국의 인간상"(신구문화사刊)이란 6권짜리 책을 읽고부터 였다.


그때부터 이괄에 올인, 참 많은 자료를 찾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괄은 우발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준비된 반란이 아니다.


인조반정후 단순한 무인인 이괄이 노회한 정치인 김류, 이귀, 김자점등의 정보정치에 당한 형국이었다.

인조반정후 반정주체세력끼리의 헤게모니 쟁탈전 와중에 단순하고 다혈질인 이괄이 걸려든 것이다.

아무튼 조선 500년 역사상

내국인이 수도 한양을 점령한 케이스는 이괄이 유일하다.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을 갔고 이괄이 쿠데타로 한양을 함락시켰지만

그 이후 정국구도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워낙 관군에게 명분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에 오래 지탱할 힘이 없었다.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한명련도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천민출신으로 주체세력과 연이 없어

이괄과 함께 엮여 반란군주모자로 낙인찍혔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임진왜란때 천민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거나 아니면 공을 세워 즉석에서 관계로 진출한 장군들을

축출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긴 일이 아닐까 추측 하는데 어느 정도 개연성도 있다.


임란때 공만 세우면 신분에 관계없이 관직에 등용시켰다가 전쟁이후 인조 2년, 1624년 이면 전쟁이후 20년, 당시 20대에 무과급제하거나 관직에 진출한 장군들이 4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들어간 전성기일 것이고

다혈질적이고 글 못하는 천민이나 양인출신의 무인들이 언제 또 인조반정같은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 속에 있는 양반들에겐 눈에 가시가 아니었을까?

인조 반정이후 수많은 역모사건이 이런 걸 반증하는 예이다.


정보력를 손에 넣은 김류가 자기와 반목하는 이괄을 엮어 넣는 일은 쉬웠을 터, 그러나 인조는 끝까지 이괄을 믿었다.

그렇지만 이괄이 영변에서 자기가 보낸 선전관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인조도 현실을 인정했다.


억울한 장군, 이괄.

그는 자기가 가장 믿었던 부하 기익헌,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난은 종결되지만 인조시대 내내 이괄의 잔당에 대한 기록은 실록 내내 나온다.


한명련의 아들 둘- 한윤과 또 한명은 청나라로 망명해 정묘호란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명련 후손은 중국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을 테고 이괄의 문중 고성이씨는 한동안 진주이씨에 의탁하다가 조선 후반에 와서 다시 고성 이씨로 살아가게 된다.


억을한 장군 이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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