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제1차 출격
1차출격은 임진란이 일어난 1952년 5월 4일에서 5월 9일 본영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록이다.
1차 출격에는 순천부사 권준이 육군에 차출되는 바람에 참전하지 못하고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중위장을 맡고 있다.
1차 출격의 주요장수
중위장(中衛將)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좌부장(左部將) 낙안군순(樂安郡守) 신호(申浩)
전부장(前部將) 흥양현감(興陽縣監) 배흥립(裴興立)
중부장(中部將)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
유군장(遊軍將) 발포가장(鉢浦假將) 나대용(羅大用,영군관 훈련봉사)
우부장(右部將) 보성군수(寶城郡守) 김득광(金得光)
후부장(後部將)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좌척후장(左斥候將) 여도권관(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
우척후장(右斥候將)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浣)
한후장(扞後將) 영군관 최대성(崔大晟,급제)
참퇴장(斬退將) 영군관 배응록(裵應祿)
돌격장(突擊將)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선봉장 우도의 장수로 예정
본영유진장(本營留鎭將) 우후(虞候) 이몽구(李夢龜)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順天代將) 유섭(劉攝)
우부기전통장 사도진군관(蛇島陣軍官) 이춘(李春)
대솔군관(帶率軍官) 변존서(卞存緖)
* 1592년 5월 4일 1차 出擊日誌
5월 4일 새벽 2시 좌수영 출발, 좌우로 나누어 미조항으로 향함. 미조항에서 합류, 오후에는 다시 항해, 저물 무렵 所乙非浦(소을비포) 앞바다에 정박.
5월 5일 새벽, 이동하여 미륵도 남서쪽의 唐浦(당포)에 도착.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기로 했으나 원균은 도착 못함. 공문 보냄. 이날 당포에 정박.
5월 6일 오전 8시경, 경상우수사 원균이 당포에 도착.
전선 1척에 南海縣令(남해현령) 奇孝謹(기효근), 彌助項僉使(미조항첨사) 金勝龍(김승룡), 平山浦權管(평산포권관) 金軸(김축),
蛇梁萬戶(사량만호) 李汝恬(이여념), 所非浦權管(소비포권관) 李英男(이영남)은 가가 협선을 타고, 永登浦萬戶(영등포만호) 禹致績(우치적), 知世浦萬戶(지세포만호) 韓百祿(한백록), 玉浦萬戶(옥포만호) 李雲龍등은 판옥선 2척에 타고 5일과 6일에 걸쳐 도착했다.
5월 6일 전라좌도와 경상우도 수군의 연합함대 결성.
작전회의후 거제도 松未浦(송미포) 앞바다에 이동 정박.
5월 7일 새벽, 출항. 가덕도쪽으로 항해. 이날 정오경에 玉浦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右斥候將 金浣 등이 神機箭(신기전)을 쏘아 올려 적 함대를 알려옴.
이순신장군은 “勿令妄動 靜重如山(물령망동 정중여산)” 즉 “함부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신중한 행동을 취하라.”라는 지시를 내림.
일본은 도도 다카도라 휘하의 30여척의 戰船.
玉浦海戰의 승리.
일본 대선 13척, 중선 6척등 모두 26척 焚滅.
<이순신의 장계>
중위장 방답첨사 李純信 대선 1척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대선 1척 당파, 왜적 1급 참수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대선 2척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중선 2척, 소선 2척
유군장 발포가장 나대용 대선 2척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대선 1척 당파, 우리나라 포로 1명 구출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중선 2척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중선 1척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대선 1척
한후장 營軍官 최대성 대선 1척
참퇴장 營軍官 배응록 대선 1척
돌격장 營軍官 이언량 대선 1척
본영유진장 우후 이몽구
좌부기전통장 順天代將 유섭 대선 1척, 소녀 1명 구출
우부기전통장 蛇島陣軍官 이춘
대솔군관 변존서, 전봉사 김효성 합쳐서 대선 1척 당파
경상우도 수군이 日本 戰船 5척을 당파, 우리나라 사람 1명 구출.
전 함대를 영등포로 이동,
두 번째 해전인 合浦海戰 웅천 땅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 등 5척을 분멸.
창원 땅 남포로 이동해 정박.
5월 8일 아침 일찍, 赤珍浦에 왜선 13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 공격하여
대선 9척과 중선 2척등 모두 13척을 분멸.
1차 출전 결과
세 차례해전을 통해 일본군선 44척을 격침. 순천의 정병 李先枝(이선지)가 왼팔에 화살을 맞은 것 외에는 사상자가 없음.
5월 9일 本營(본영)으로 돌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