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일기 3
오늘은 일직(日直)이라서 혼자 조용히 사무실에 있으니
이 또한 樂이 아니겠는가?
간만에 혼자 있는 시간을 얻었다.
서울생활에서 유일한 樂은
책冊이었고 책은 구원이었다.
내가 졸업한 국민학교는 몇년 뒤 폐교되고
중학교의 기억은 참담하다.
학교라기 보다는 기업이라고까지 생각되어 진다.
이사장의 농장에 가서 송충이를 잡던 기억이라든가
이사장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학생 동원해서
선거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런지 모르지만 아무튼 학생한테 집에 가서
동네사람한테 자기 얘기하라고 한 건 사전선거운동이라고 보여진다- 을 시키고
아무튼 사춘기 문학소년한테는 불만투성이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독심술讀心術이나 명상, 우주과학관련 서적이었던 거 같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부조리한 세상을 분노하며
속으로 삭히고 있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는 너무 맘에 들었다.
오래 뒤 회사에서 동료들한테 내가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을 얘기하면
모두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하든가
아니면 뻥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내가 경험한 사실이다.
내 또래들 중에서 방과후 야간자율학습시간을 안했던
친구들이 거의 없는 반면에
우리는 7교시 수업 후 모두들 서클활동을 했다.
그림 그리는 친구는 미술반,
합창반 - 합창반은 오디션을 봐야 들어간다. 여름방학엔 합숙훈련도 간다.
원예반 - 전국에서 국화전시회는 3번째로 크다. 건국대, 서울 시청, 그리고 우리 학교다.
방송반, 신문반, 유도반 등
나는 당연히 문학반에 들어갔다.
- 다른 학교는 문예반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문학반이라고 했다.
중학생때만 해도 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곳에서 진짜 많은 천재와 만났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이 문학반에서 많은 천재들을 만났다.
(뭐, 이것도 생각해 보면 사춘기소년의 과장일터 당시엔 그들이 그렇게 보였다)
고등학교 문학반에서 활동했던 여럿이 문단에 데뷔했다.
나도 고 1때 시집을 냈다.
한 100부가량 - 뭐 근사한 양장본은 아니고 인쇄소에서 필경사가 써서 제본한 책인데
아버지께서 뭉칠르 들고 가셔서 만들어 주셨다.
다 잃어 버린 줄 알았는데
10년 전 이사하다가 한 부를 발견했다.
제목이 "空想(공상)의 所産(소산)"이라고 좀 졸렬하긴 하다.
이상(李箱)의 "오감도(烏橄圖)" 영향을 받아
시 제 1호, 제2호, 제3호...시 제30호까지 쓰고
"천기도(天氣圖)“라는 장시,
이 시는 김기림(金起林)의 "기상도(氣象圖)"의 영향을 받은 시였다.
폐허의 동인지 서시를 보고 흉내내서 서시도 썼다.
나중 보니 고1 수준으로는 좀 괜찮다고 여겨지지만
아무튼 딱 그 수준이었다.
다른 서클보다 문학반아이들이 좀 불우한 환경인 듯 했다.
대부분이 공부도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고 뭔가 결핍이 있는 상태랄까,
나도 남들보다는 나았지만 뭔가 충분하지는 않은 그런,
7교시 끝난 후 문학반에 모이는 시간만 기다렸다.
그 당시에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외우고,
플로베르, 키츠, 말라르메, 바이런, 워즈워드의 시를 외웠다.
난 형이 영문과 대학생이어서 다른 애들 보다 유리했다.
키츠나 쉘리, 워즈워드, 바이런의 시를 원시로 읽었으니까...
형의 필명이 K. 바이런 이었다.
형의 시를 내가 쓴 것처럼 학교에 갔고 가면 꽤 먹어줬다.
나중엔 그게 부끄러운 일로 생각 되서 그러지는 않았지만.
참, 내 필명은 李茶였다.
그 당시 우리의 우상은 李箱이었다.
다른 친구는 李端, 許魏, 許口, 趙世, 羅迅, 柳亨洙, 전철등
문학소년 다운 치기가 넘치는 시기였다.
학교 앞 시궁창이 흐르던 개울은 세느강,
그 위 다리는 미라보다리등 문학소년다운
낭만이 넘치는 내 삶의 오아시스였던 시기였다.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시인선이 우리들의 바이블이었다.
그리고 정현종(鄭玄宗)의 "고통의 축제",
강은교(姜恩僑)의 "풀잎",
김수영(金洙暎)의 "거대한 뿌리" 김춘수(金春洙)의 "처용",
고은(高銀)의 “文義(문의)마을에 가서"등이
우리들이 늘 품고 다니는 교과서였다.
아무튼 암울한 시기에도 고등학교에서 찾은
문학반이 하나의 구원이었다.
망명객에게 유일한 빛이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