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전리 산고散稿 9

-9. 행복어사전에 대한 추억

by 우인

행복어 사전에 대한 추억


사춘기 시절, 그 외롭고 우울했던 때

나를 지탱해준 것은 문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한 달에 한 번 발행되는

[문학사상]이라는 잡지였다.


문학사상 나오는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고 말해도

크게 과장되지는 않는 말이다.

문학사상에 연재되던 "행복어사전"을 읽기 위해서였다.


꽤 오래 전에 MBC에서 드라마로 방송했는데,

생각만큼은 아니어서 실망하였다.

(아마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게다)

최수종이 주인공이었는데

소설로 읽던 그 느낌이 제대로 닿지 않았다.


이병주 원작의 이 소설은

주인공인 서재필을 중심으로 그의 연인인 차미숙이

근무하고 있는 신문사 교열부가 주 무대이다.


서재필, 이 이름에 주요한 포인트가 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서재필은 실을 載지만,

'행복어사전'의 주인공인 서재필은 있을 在다.


이건 이 소설에서 아주 주요한 설정이다.

그냥 그대로 있겠다.

이런 뜻이다.

주인공의 처세철학을 한마디로 상징한 단어다.


사실 주인공은 얼굴도 미남이고 신문사에도

수석으로 입사했지만 본인이 소위 물먹는 부서인

교열부를 지원한 것이다.

그 부서에는 낙백한 선배들이 있지만

모두 나름대로 사연을 갖은 채로

- 사이비 옥황상제교의 교주인 사람도 있고-

윤 뭐였는데 이름은지금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

그리고 비원천녀(非願千女),

평생 천 명의 여자와 잠자기를 꿈꾸는 김달수 등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살아있다.


나에게 참 많은 영향을 준 소설이다.

서재필의 철학이 사춘기 소년인 내게

무차별로 침투한 거라고 생각된다.

중 3때 읽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출세에 목매어 살지 않겠다.

나만의 세계를 갖겠다.

한 여자만을 사랑하겠다.

뭐, 이런 여러 가지 가치관을

이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되었다.

나중에 조금 변했지만.


작가 이병주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서 놀랐었다.

대학에서 한 선배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보길래

김원일작가랑 이병주를 말했더니

날 거의 삼류로 취급하였다.

문학을 모른다나 뭐라나,

참 내 어이가 없어서.

내 안목이 그 정도냐는 거다.


이병주가 어때서,

물론 나중에 이병주의 소설을 읽어 보니

다작에 예술성면에서는

비판받을 점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뭐, 삼류 취급은 너무 심하다.


이 '행복어사전'의 제목만큼은 초일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보다도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작품은 제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있다고 하는데

최인훈은 최인훈대로, 김승옥은 김승옥대로,

이청준, 조정래, 황석영, 김원일, 장용학, 손창섭

모두 존재 가치가 있는 거가 아닌가.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병주도 우리 문학사에 차지하는 자리가 있고

다 소중한 작가인데 너무 순수문학에 경되되는

나는 그런 편협한 잣대가 오히려 싫었다.


참,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

1975년도에 나온 소설이라 지금의 감각과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서재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에는

이 시대에도 받아들일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요즘 mz들은 싫어할테고

운동했던 사람들은 더 싫어할 것이다.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현실에 순응하게 만드는 소설이라고,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다고 보지만

다른 걸 다 감안하고 그냥 재밌게만 읽으면

아주 재밌는 소설이다.


한 1년을 잘 넘어가게 한 소설

'행복어사전'에 대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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