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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영 Aug 18. 2020

Hello, Dominique Perrault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인터뷰 _ 2008년 6월 파리 11구 

토요일 오전, 비 내리는 파리 11구 Bouvier(부비에) 거리에서 포토그래퍼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서늘해진 파리의 날씨를 의아스러워하며, 먼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골목의 정적을 깨고 94년식 초록색 GOLF 한 대가 달려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우릴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곤 다시 날렵하게 달려 100미터 전방쯤에 주차를 하고는 차에서 내린 누군가가 골목을 걸어온다. 동행한 통역자가 “설마?” 라고 가늘게 내뱉었고, 나는 그제서야 GOLF의 드라이버를 유심히 바라봤다. 왼손에 들린 시가, 큰 검정색 가방, 한 뭉치의 파일, 온통 블랙의 차림을 하고 큰 보폭으로 걸어오던 그는 누가 보아도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자의 모습이다. 아무도 없는 토요일의 사무실 문을 직접 열며,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던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그가 불과 석 달 전에도 서울을 다녀간 사실을 상기한다. 20세기 초반의 공장 건물을 개조한 넓직한 스튜디오 2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창문을 열고, 한동안 뒤뜰의 나무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 시선은 그의 자리에 붙어 있던, “작업진행현황” 이라고 한글로 쓰여진 도면 한 장에 고정되었다.


과거, 다소곳한 다리가 놓여 있던 이화여대 정문에 유리와 강철 블레이드로 이루어진 거대한 진입로가 지난 4월에 완성되었다. 2004년 국제현상설계로 당선된 도미니크 페로는 이 건물에 대학으로 진입하는 산책로이자 회의실, 도서관, 극장, 상점 등이 갖춰진 캠퍼스 콤플렉스의 기능을 부여했다. 근대 여성교육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이화’의 문을 프랑스 건축가에게 맡긴지 3년 만에 ‘대학과 도시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라는 아이디어는 물리적으로 실현되어 우리 눈 앞에 섰다. 불과 서른 아홉의 나이에 <프랑스 국립 도서관> 설계현상에 당선되어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도미니크 페로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이는 많다. 비단 건축계 뿐 만이 아니다. 나 역시, 마주하고 앉아 ‘페리에’를 따르는 그의 모습보다 95년도 ‘프랑스 국립도서관’ 완공 시 미테랑 대통령을 곁에서 수행하던 흑백사진 속 젊은 그가 익숙하다. 80년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야심 차게 기획한 ‘Grand Projects’ 는 건축분야에 있어서 라 데팡스에 세워진 ‘그랑 아르쉐’, 베르나르 추미의 ‘라 빌레뜨 공원’ 등 오랜 도시 파리의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직각으로 펼쳐진 네 권의 책을 형상화시킨 도미니크 페로의 국립도서관은 ‘문화와 지성’이라는 어휘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심리적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더 진하게 각인되었다. 이후 룩셈부르크 사법재판소, 베를린 올림픽 수영장 그리고 인스부르크 타운 홀 등의 현상설계에 당선되며 굵직한 유러피안 프로젝트들을 진행시키며 십 수년을 보낸 지금, 파리 시내의 모든 지하철 역 마다엔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그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크리스티앙 포잠팍, 렌조 피아노, 장 누벨 그리고 작년 리차드 로저스로 이어지는 일군의 건축가들이 그들의 건축철학과 어휘를 풀어놓았던 전시(展示)의 장을 올해는 도미니크 페로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인터뷰 영상에서 보았던 대로, 그는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근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인터뷰 이후 곧장 서울서 온 ‘한국인 건축가’와 약속이 있다는 당부와 함께.







박선영:이화여대 프로젝트가 마침내 끝났고, 올 봄 서울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화여대 프로젝트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도미니크 페로:이화여대 프로젝트는 국제현상 설계공모였다. 단지,대학캠퍼스에 몇 개의 건물동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캠퍼스의 풍경을 재구성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언덕을 파내고, 교정의 새로운 입구가 될 커다란 계곡을 형성하고, 새로운 입구를 만드는 것인데, 이 새로운 입구는 오래되고 역사적인 건물들과 대학본부가 있는 곳으로 통하게 된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현대와 과거의 연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선영:프로젝트 이전, 그곳은 오래된 교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현재의 변화에 시각적인 충격을 느끼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도미니크 페로:그런가. 그러나 장소는 오래되었지만, 학생들은 전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모던하지 않은가. 사실, 이 현대적 건물은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는 않는다. 건물이 크고 현대적이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급격한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모던한 느낌을 주지만, 거칠지 않은 부드러운 모더니티다. 다시 말하면, 여성스러운 모더니티에 가깝다.




박선영:서울에서 프로젝트는 처음인 걸로 알고 있는데, 서울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나? 그리고, 서울이 더 나은 도시가 되기 위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 한다면?

도미니크 페로:서울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로 생각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한강이다. 한강은 엄청나게 크고, 강변을 가지고 있다. 서울은 크게 강북, 아주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한강, 그리고 강남이라는 세 영역으로 나뉜다. 그래서, 한강을 따라 진행되는 개발사업 등 모든 프로젝트들이 정말 특별하고 중요하다. 이는 현재 강변에 차도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강변은 물과 경관으로 인해 정말 아름다운 장소이다. 따라서, 공해, 소음방지, 녹지공간, 더 많은 공원들 등. ‘삶의 질’의 관점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될 수 밖에 없다.





박선영:퐁피두에서는 당신 전시 이전, 렌조 피아노와 장 누벨, 그리고 작년엔 리차드 로저스의 전시가 있었다. 올 해 당신 전시는 어떻게 기획되었는가?

도미니크 페로:퐁피두 센터에서는 정기적으로 전시를 통해 소개 될 건축가를 선택한다. 큐레이터 프레데릭 미게루 (Frédéric Migayrou)가 퐁피두센터 관장과 함께 건축가를 선정하고 전시 프로그램을 결정한다. 나는 퐁피두에서 전시하는 3번째 프랑스 건축가인 셈이다. 대략 5년에 한번씩 프랑스 건축가가 선정되는데, 건축가들 중에서 유명하고 여러 나라에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국제적인 수준에서 알려진 그런 사람들이 뽑힌다. 그나마 렌조 피아노나 장 누벨, 리차드 로저스 중에서는 내가 가장 젊었었는데, 전시를 하고 나서 나 역시 나이 든 사람들 축에 끼게 된 것 같다.






박선영:전시회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빼꼼히 내민 당신 얼굴이 매우 익살맞아 보여서 시내 곳곳에서 포스터를 만날 때마다 기분이 유쾌해진다. 저 연출은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도미니크 페로:(웃음)사실 사진작가가 처음에 다른 걸 연출했었는데, 만족스럽지 않았다. 매우 심각해 보였고, 모형들 사이에 선 모습이 너무 전형적이었다. 내가 포스터에 동적인 느낌을 넣고 싶다는 제안을 했고, 그 이후부터는 사진작가도 열심히 움직이며 촬영을 했다. 지하철에 붙은 포스터들 재미있지 않나. 아주 만족스럽다. 





박선영:당신은 파비용 드 라즈날 (Pavillon de l’Arsenal)에서 전시를 구성한 경험도 있고, 작년 보르도에서의 전시를 비롯, 수많은 그룹 혹은 개인전을 선보였다. 건축가에게 ‘전시’란 무엇을 의미하며, 당신에게 그것들은 어떠한 경험이었나?

도미니크 페로:건축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논리적인 발전과정이 존재한다.완성된 건물자체를 보고 건축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선 하나, 박스 몇 개로 시작한 아이디어가 도시공간에 어떻게 개입하게 되는지, 어떤 변경을 거치는지 등을  전시의 형태로 경험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언급한 것들은 대규모 전시회였지만, “Galerie d’Architecture (건축갤러리)” 라는 작은 건축갤러리에서의 전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 공간은 파리시내 한복판에 있는 건물의 1층에 있었는데, 카펫 색깔을 인도의 색깔과 맞추어서 길(인도)이 갤러리 안까지 이어지도록 했다. 사람들은 전시가 길에서 열리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길이 전시장에 있게 되는 셈이다. 이것은 건축에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 건축은 길 주변에 그리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도시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박선영:이번 전시를 통해 <프랑스 국립 도서관> 이외의 다양한 당신의 프로젝트들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직 진행 중인 몇 개의 프로젝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

도미니크 페로:현재 바르셀로나에 큰 고층빌딩 하나를 거의 마무리 해가고 있는데 5성급 호텔이다. 7월, 8월경에 완공예정이다. 영국에서 아주 작은 파빌리옹 (Pavillon du Priory Park)을 하나 진행 중이라 다음 주에 가야 한다. 그리고 “유럽 사법재판소(La cour européenne de justice)”라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이건 프랑스국립도서관처럼 공공기관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또 마드리드에 아주 흥미로운 걸 하고 있다. 일명, '매직 박스'라고 부르는 테니스 경기장인데 , 커다란 지붕이 열리고 닫힌다. 이건 내년 봄에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오사카에 진행 중인 후쿠쿠 생명보험회사 프로젝트을 위해 일본에도 갈 계획이다.





박선영:러시아에서의 프로젝트는 어떠한가? 러시아에서의 컴페티션은 1931년 꼬르뷔지에의 ‘소비에트 팔레스’ 이후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러시아의 건축환경은 좀 다를 것 같다.

도미니크 페로:러시아 오페라 프로젝트에 대해 말하는 건가? 우리는 더 이상 그 프로젝트에 관한 계약서가 없다. 건축주가 그 계약을 파기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설계도면을 가져가서 그것을 가지고 지금 오페라를 건축하고 있다. 사실 건축주는 러시아 정부당국인데 그들이 말하길, “우리는 도미니크 페로의 오페라를 지을 것이다, 도미니크 페로 없이” 라고 했다. 이게 러시아 스타일이다. 올바르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그냥 기다리는 중이다. 다만 내 설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프로젝트의 모형 전부와 초기작업의 결과물들을 이번 퐁피두 전시에 제출했다. 러시아가 우리가 제출한 설계안대로 오페라를 건설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짓는지 두고 볼 것이다. 건물이 완성된다면, 그건 국제적인 스캔들이 될 것이다.





박선영:당신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룩셈부르크 사법재판소>등 스케일이 큰 공공건물 설계를 많이 하는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M-Preis> 슈퍼마켓은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기념비성은 없지만 무엇보다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공간이다. 당시에 무얼 염두했나?

도미니크 페로:슈퍼마켓은 매우 가까운 일상적 공간이다. 또 가득찬 공산품들을 소비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눈 쌓인 산이 펼쳐진 그 마을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자연이 그 건조한 공간 안으로 들어와 마치 자연 안에서 쇼핑하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도록 하고 싶었다. 또한, 엠프라이스(M-Preis) 슈퍼마켓이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갖기가 힘들다. 그래서 슈퍼마켓을 작은 뮤지엄처럼 디자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 그 마을이 뮤지엄을 필요로 하게 될 때, 슈퍼마켓을 비우고 뮤지엄으로도 변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되면, 슈퍼마켓에 특별한 성격을 즉각적으로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박선영:그것이 당신이 이야기 해왔듯이 '건축은 변화하는 것' 이라는 부분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건축가의 임무는 사실상 건물이 완성되면서 끝이 나지만 이후에 사용자와 주변상황 등에 의해 달라지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도미니크 페로:사실, 그런 생각은 아주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건물이 지어지고 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건물의 일생은 그때부터 시작한다. 완공된 건물은 막 태어난 아기와 같다. 다시 말하면 건물은 항상 바뀐다, 마치 우리들처럼. 건축은 살아있는 것이어서 늘 바뀌고, 움직이며 사람들이 다시 오고, 다시 시작하고, 변경된다. 그것은 닫힌 것이  아니라 열린 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박선영:피터 아이젠만은 요즘 학생들이 더 이상 ‘팔라디오’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에게는 미스 반 데어 로에, 루이스 칸, 르 꼬르뷔지에 등 어떤 단단한 규범이 있었던 것과 달리 최근 당신이 만난 젊은 건축학도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도미니크 페로:우선 피터 아이젠만은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사람이다. 그래서, 그와역사와의 관계는 너무 아카데믹한 측면이 있다. 우리 유러피언의 역사와의 관계는 그것에 비해 훨씬 더 보편적이다.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언급처럼, 요즘 학생들은 역사를 좀 덜 존중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과 역사와의 관계는 우리 세대에 비해 더 복잡하고, 더 넓고, 더 열려 있으며 더 혼합적이다. 이런 것이 완벽한 교육이나 문화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새로운 우리만의 역사를 만들 수 있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역시 더 흥미로울 수도 있다.





박선영:당신의 ‘미니멀리즘 건축’을 언급하면서 도널드 저드를 거론해왔으며 최근 출판된 다니엘 뷔랭에 관한 책에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 늘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최근 당신은 현대미술의 어느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도미니크 페로:나에게 현대미술은 건축작업의 한 부분이다. 현대미술은 우리들에게 자신이 존재하는 곳, 삶에 대한 태도와 시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어떤 감정들의 총체이기도 하다. 결국 건축과 현대미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건축은 미니멀리스트나 랜드아티스트처럼 주변과 관계를 가지면서 태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그런 영역이다. 이런 분야는 모두 같은 감수성안에 있는 친숙한 관계들이다. 물론, 건축이 더 크고 단단하고 무겁긴 하지만, 건축의 컨셉 속의 어떤 부분은 현대미술과 연관이 있다. 최소한 나에게는.





박선영:당신은 '건축가'라는 말이 너무 보수적인 표현이라며 '프로젝트 맨' 이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건축가'라는 표현이 보수적이라 말한 이유가 매우 다층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즉, 과거의 건축과 현재의 건축환경 자체가 다른 것이라는 뜻인가?

도미니크 페로:그렇다. 나는 ‘프로젝트 맨’이다. 모두가 다 그걸 물어본다. 대개들 건축가라고 하면 사람들은 집을 짓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지금의 건축가들은 단지 집만 짓지 않는다. 프로젝트를 건축한다. 그것은 큰 건물이나 도시기획, 환경, 전시나 디자인까지 포함한다. 도시환경이 더 다이내믹해지고, 삶이 복잡해지면서 건축 역시 다층적인 면들을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늘날 건축을 파사드나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 없지 않은가.





박선영:당신의 블랙 차림을 예상했었다. 당신을 포함해서, 왜 건축가들은 검은색을 고수하는가?

도미니크 페로:우선 나는 기본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그런데, 아침에 옷장을 열면 모두 검정색 뿐이라 무얼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절약된다. 또한,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라 여행 도중 무엇을 묻히거나 흘려도 자국이 보이질 않아 편하다. 여러모로 실용적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화여대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면, 점심은 이화여대 총장이랑 먹고, 오후에는 인터뷰가 있고, 저녁은 리움 미술관 관장과 함께한다. 늦은 밤엔 W호텔에 한잔 하러 간다. 이런 상황에서 옷을 자주 갈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검정색 옷을 입고 있으면 어디에서나 잘 어울린다. 완벽하다. 이건 숭배가 아니라, 단지 미학적인 것이다. 미학은 어디서나 통하기 마련 아닌가.





박선영:당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가 있나?

도미니크 페로:장소? 영감이란 지속적인 것이다. 나에게 그런 마술 같은 공간은 없다. 인스퍼레이션(영감)은 지금, 순간의 것이면서 동시에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영감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움직이면서 나오는 것이다.





박선영:8월이면 많은 파리지엥이 바캉스를 떠나는데, 당신은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올 여름 바캉스 계획은 무엇인가?

도미니크 페로:나에겐 바캉스 계획이 없다. 그저 하루 정도 쉬는 게 바캉스다. 그런 휴식이 좋다. 왜냐하면 휴가를 떠나도 처음 3일 정도는 괜찮지만 4일째부터는 전화가 다시 울리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발생한다. 그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하루 정도 쉬는 게 좋다.




박선영: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 당신에게 건축은 그저 ‘직업’이 아니라 ‘사명’인가?

도미니크 페로:사실 건축가라는 직업을 결정하는데 부모님의 의사가 크게 반영되었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미술에 대한 내 태도는 무겁지 않았고 그저 막연했다. 그 때 부모님들은 안정된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결국 난 건축을 택했다. 건축은 예술적이면서도 테크닉적인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도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박선영: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이 사명인가? 

도미니크 페로:그렇다. 결국은 사명이다. 건축은 아주 훌륭한 분야이고, 난 만족한다.




*2008년 6월 이화여대캠퍼스 프로젝트를 막 끝내고, 퐁피두 센터에서 대형 회고전을 시작할 무렵의 도미니크 페로와의 인터뷰는 파리 11구 그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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