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OO일에 한국에서 손님이 오실 거야"
"알았어요. 정확한 날자 알려주면 준비할게요."
십여 년 전 남편의 직장 일로 해외에서 거주할 때였다. 한국에서 출장 오는 남편 손님들에게 머무는 동안 한 번은 꼭 한식을 직접 요리해서 따뜻하게 대접했다. 해외에 머물 때 집밥이 얼마나 그리운 지 알기 때문이다. 나의 첫 해외여행 때 집밥(밥과 김치)이 먹고 싶어 고생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집밥이 그리워 생고생
27년 전(1992년) 3대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터키 앙카라에 살고 있었고 시부모님과 시이모님이 오셔서 3,4살 인 아들 둘과 함께 7 식구가 함께 떠난 여행이다. 나이 드신 부모님과 어린애들을 데리고 무슨 배낭여행이냐고 반문하겠지만 당시는 정보도, 경험도 없어서 주변 유학생이 알려주는 데로 그대로 도전했다. 여행 정보서 하나 들고 터키 이즈미르에서 그리스를 향해 배로 출발해 독일 베를린까지 2주 동안 8개국을 돌고 다시 이즈미르로 오는 코스였다. 식구마다 배낭을 메고 호텔에서는 3일에 한 번씩 묵고 배와 야간열차를 이용하며 숙소 값과 시간을 절약하기도 했다. 그 여행은 당시 한창 붐을 이루고 있던 대학생 배낭여행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여행을 너머 고행이었다.
그리스, 이태리, 스위스를 여행하고 프랑스 파리 동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우연히 대학교 후배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전쟁 때 헤어졌다 만난 형제처럼 반가워했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그 후배는 남편의 선배이기도 한 선배 가족이 파리 근교에 살고 있고 엊그제 만났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남편은 그 선배의 전화번호를 받고 바로 연락을 해 대뜸 집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선배가 먼저 초대도 안 했는데......
파리 동역 근처 별 2개 작은 호텔에 방 2개를 잡아 배낭을 던져 놓고 Metro를 타고 그 선배 집을 향해 갔다. 우리 7 식구는 난생처음 가본 도시의 메트로를 2번 갈아타고 1시간 30분 정도 걸려 어느 한적한 곳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시도했다. 받지 않았다. 1번, 2번...... 10번 20번도 더 전화를 해도 여전히 받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2시간 정도가 흘렀고 모두 지칠 대로 지쳤다. 햄버거나 양식은 느끼해서 도저히 먹고 싶지가 않았다. 주변 작은 가게에서 과자와 오이 몇 개를 사고 우리 7 식구는 메트로를 2번 갈아타고 동역 근처 작은 호텔로 돌아왔다.
비상용으로 가져간 전기 곤로(코일이 미로처럼 감겨있는 전열기)에 밥을 넉넉히 했다. 오이와 고추장, 멸치 볶음, 김구이로 훌륭한 식사를 준비했다.
"엄마, 오이~ 오이 맛있어요. 고추장도 찍어주세요."
콧등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힌 3살 난 아들은 오이를 아삭아삭 씹으며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이태리에서 사놓은 쌀이라 풀풀 날리는 밥이지만 멸치볶음과 고추장, 김과의 조화로운 맛은 환상적이었다. 낯선 동네에서 산 오이는 고추장과 함께 김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호텔방에서 초라하지만 맛 좋은 집밥을 먹은 우리 대 식구는 평안한 파리의 첫날밤을 보냈다.
집밥이 그리운 손님을 위해
우리 가족은 10여 년 전 폴란드 바르샤바에 4년 동안 거주했다. 손님 초대할 일이 많았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항상 따뜻한 토종 한식을 대접했다. 손님 초대 날짜에 맞춰 음식 준비는 1주일 전부터 시작했다. 첫 해외여행 때 7 식구가 집밥, 특히 밥과 김치가 먹고 싶었던 때를 생각해 야채 도매시장에 가서 배추와 무 등 재료를 사서 김치부터 담갔다.
김치 이 외 메뉴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해외여서 재료 구하는 게 쉽지 않고 때로 맛도 달라서 먼저 실험 삼아 만들어 먹어보고 메뉴로 정해야 했다. 그 후 손님 초대 메뉴는 늘 비슷하게 준비했다. 많은 종류는 아니어도 느끼하지 않도록 요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코스 요리일 때 메뉴는 다음과 같다. 연어 오이롤, 호박 죽이나 잣죽, 주 메뉴는 장어구이와 소갈비, 기본 반찬은 김치, 나물, 가지 양념구이 , 오이지, 밥과 된장국, 디저트로는 팥양갱과 녹차를 내놓았다.
애피타이저인 연어 오이롤은 직접 개발한 메뉴이다. 오이를 감자 깎는 칼로 길고 얇게 자르고 빨강, 노랑, 초록 파프리카와 훈제 연어를 스틱 모양으로 잘라 준비한다. 오이 위에 잘라 놓은 재료와 키위 소스(키위 갈아 매실과 소금 섞음)를 1/2ts 얹어 둥글게 말아 접시에 3개 정도 놓았다. 호박죽이나 잣죽은 설명 필요 없고 문제는 장어구이이다.
당시 두 아들이 고등학생이어서 공부하느라 너무 고생해서 보양식을 고민하던 중 생선가게에서 장어를 발견하고 구입을 했다. 장어구이를 하기 위해서는 장어를 손질하고 소스를 만드는 일이 문제였다. 인터넷을 뒤져 반을 갈라 뼈를 빼는 법과 장어소스 만드는 법을 배웠다.
장어는 레몬즙으로 문질러 미끌거림을 없앤 후 나무 도마에 못을 박고 장어 머리를 꽂아 반을 길게 가르고 뼈를 발라냈다. 장어 소스를 위해 뼈를 프라이팬에 기름 없이 볶아 끓여 육수를 만들고 그 육수에 고추장, 간장, 생강, 마늘, 매실즙 등을 섞어 조렸다. 손님 초대 3일 전쯤 작업을 하고 만든 장어 소스에 재워놓고 당일에 살짝 익혀 놓았다가 내놓기 직전에 뜨겁게 구워냈다.
생장어부터 식탁에 장어구이를 올리기까지 굉장히 번거로웠지만 먹는 사람 모두 좋아했고, 그 후 우리 집 대표 메뉴가 되었다. 아들들을 먹이고, 손님들이 무척 좋아했을 때의 기쁨은 노동의 고통을 잊게 했다.
소갈비는 외국에서는 비싼 재료가 아니므로 별 부담이 없고 나물은 시금치 등 계절에 따라 달리했다. 미리 담아 놓은 오이지를 잘라놓으면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 좋아했다. 팥양갱은 삶은 팥을 갈아 한천과 설탕을 넣어 끊이고 식혀서 대접했다. 어떤 분들은 '외국에서 팥양갱을 먹다니'라며 싸가기까지 했다.
집에서 식사한 손님들은 해외에서 직접 요리한 한국 음식을 먹고 며칠 동안 쌓인 여독이 풀리고 느끼함이 다 사라졌다고 너무 고마워했다. 음식마다 맛있다고 드시다가 마지막으로 밥과 된장국을 드리면 특히 더 좋아했다. 손님들이 고맙다고 말할 때마다 'My Pleasure'라는 영어 표현이 어찌 그리 딱 맞는지...... 그들을 위한 식사 준비는 '나의 기쁨'이었다. 결혼 후 남편이 해외 근무가 많을 거라는 말을 듣고 내조를 위해 한식 요리사 자격증도 따고 일품요리도 배워 놓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30여 년 전 7 식구가 찾아간 남편 선배 집이 파리 근교 어디쯤이었는지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 한국에서 그 선배를 만났어도 그날의 일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우리 가족은 파리 여행 첫날 왜 그 먼 곳까지 대식구가 찾아갔을까? 선배가 파리에 살고 있다고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따뜻한 쌀밥과 김치가 떠올랐다. 여행 1주일이나 경과되었고 외국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주로 햄버거나 피자로 식사를 때운 상태라 식구 모두가 집밥이 너무 그리웠다. 특히 한국에서 오신 나이 드신 부모님과 이모님은 더욱 힘들어하셨다. 밥과 김치가 있는 집밥을 실컷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군침까지 돌았었다. 요즘은 숙달이 돼서 해외에서 한 달을 한국음식을 안 먹어도 잘 견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황당한 행동이었다. 선배가 전화를 받아서 그 선배 집에 갔더라도 나이 드신 분 3명과 아이 둘까지 7 식구를 보고 얼마나 놀랬을까! 난생처음 파리에 갔고 겨우 4일 동안 머물건대 그 귀한 시간에 그 먼 곳까지 가다니...... 시간도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식당 갔으면 간단했을 텐데 '파리에 선배가 살고 있다'라고 듣는 순간에 집밥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그 당시는 '여행보다 밥'이었다. 지치고 배고픈 채로 돌아와 호텔 방에서 한 식사는 집처럼 편안했고 초라하지만 맛이 기가 막힌 내 인생의 최고의 집밥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폴란드에서 대접한 손님들도 '낯선 곳에서 따뜻하고 맛있는 집밥'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