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연습 그만두고 달리기 연습을 시작한 오리의 물갈퀴는 찢어지고 만다.
당신이 제일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라.’ -R. 이안 시모어-
남편이 내일부터 출근한다. 30년 넘게 공직에 있다 퇴직하고 재취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더욱 기쁘다. 인맥을 동원한 게 아니라 순전히 본인이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일에 매진해서 그 실력을 인정받아 취직을 해서 더 감동스럽다.
퇴직 10개월 전에 공로연수에 들어갔다. 매일 출근하던 남편이 집에 있으니 갑자기 당황이 됐다. 나도 하루의 루틴(Routin)이 있는데 어느 정도 조절하고 포기해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공로 연수나 퇴직 일정이 이미 몇 년 전에 정해져 있었음에도 우리에게 오지 않을 일처럼 마음의 준비를 안 했다는 증거다.
남편은 영어공부를 좋아한다. 덕분에 해외근무도 여러 번 했고, 퇴직 후에도 영어실력으로 재취업하고 싶어 했다. 공로연수가 시작되고 며칠을 집에서 쉬더니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평생 혼자서 영어공부했으니 강남 유명학원에서 배우고 싶다는 거였다. 학원을 재밌게 다니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토익(Toeic)과 스피킹(Speaking), 라이팅(Writing) 성적을 이 전보다 더 높은 점수로 받아두었다.
대부분 전업주부들은 남편이 집에 있으면 최대한 집에 함께 있으려고 노력한다. 나도 처음에는 스케줄도 잡지 않고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며 괜히 동당거렸다. 남편은 집에 있는 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쉬며 ‘평일 날 낮에 집에 있는 게 너무 좋다’고 행복해했다. 남편은 본인이 집에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나에게 편하게 할 일 하라고 했다. 하기야 하루 이틀 끝날 일도 아니고 나도 그동안 지내 온대로 지내야 서로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식사 준비만 잘해 놓고 평소와 다름없이 활동했다.
2016년 12월 31일 부로 퇴직을 했다. 38년을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명예롭게 은퇴를 하게 된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남편의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고 은퇴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퇴직 후 2-3일 후에 바로 출발할 수 있는 하와이 여행을 계획해 두었다. 미리 3년 전에 은퇴 후 여행을 위해 적금을 넣어 여행 경비를 마련해 두었고 겨울이라 따뜻한 곳, 하와이로 여행지를 정한 것이다. 남편은 가까운 곳 며칠 다녀오자고 했지만 멀고 활동성이 많은 여행지일수록 젊을 때 가야 한다고 우기며 하와이 여행을 밀어붙였다. 역시나 하와이는 스노클링, 트레킹 등 즐길거리가 많아 되도록 젊을 때 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와이 자유여행 계획을 짜면서 책도 두권 읽고 인터넷 서핑하느라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힘들긴 했지만 덕분에 2주 동안 태어나서 가장 편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은퇴 후 여행으로 미뤄두었던 울릉도·독도도 다녀오고 베트남, 캄보디아, 일본 여행도 다녀왔다.
몇 개월 동안 실컷 여행을 하고 한가해지니 불안감이 슬슬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리에게도 드디어 은퇴라는 게 왔구나!’ 싶으며 허전했다. 은퇴를 하니 공로연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은퇴 전에 일자리 정해놔야지 퇴직 후에는 취직이 어려워.”
‘누구누구는 어디에 취직했다더라.’
‘남편은 퇴직하고 계획하는 일이 있느냐?’는 말은 불안감에 불씨 하나씩을 더 던져주었다. 30년을 넘게 열심히 일하고 초등학교에 입학 한 이후 평생 처음으로 편하게 쉬는 셈인데 또 일자리를 찾아야 하다니......
아직 50대인데 벌써부터 그냥 놀기에는 젊다는 건 동감하지만...... 사는 게 참 고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남은 삶 동안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 하고 살면 좋으련만 현실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긴 휴식보다는 열심히 일 한 후에 오는 짧은 휴식이 더 달콤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남편은 주변 사람들이 많이 하는 박사과정도 안 했고, 자격증이나 재취업을 위한 공부에도 도전하지 않았다.
몇몇 곳에서 일을 도와달라고 했지만 거의 인맥을 이용해 영업을 해야 하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남편은 이제 본인이 좋아하는 재밌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일이란 뻔했다. 영어 공부 실컷 하며 영어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럼 회사의 해외영업이나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것인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몇 번 이력서를 넣어 시도했지만 그들은 모두 어린 나이를 원했고 경력자를 찾았다.
“돈은 더 안 벌어도 괜찮아. 그냥 평생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찾아서 매진해봐.”라고 난 늘 말했다.
남편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난 진심이었다.
남편은 퇴직하고 몇 달을 여행하고 놀더니 본격적으로 취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원하는 일자리’를 위해 밑바닥부터 일하며 경력을 쌓아야겠다고 이력서를 냈다. 회사 측에서는 그런 자리도 할 수 있겠느냐고 의아해하며 합격시켜주고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교육을 받는 중 기회가 찾아왔다. 남편이 가고 싶어 했던 자리의 면접 기회가 뜻밖에 주어졌다. 그 자리를 위해 면접을 했던 사람들이 면접관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남편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 기회를 놓칠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은 외국인과 30분 동안 영어면접을 훌륭히 했다. 면접관은 굉장히 만족해했고 결국 남편은 합격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라도 일하겠다는 맘으로 도전했는데 가장 높은, 지난 3년 동안 목표로 했던 자리에 가게 된 것이다. 공로연수 10개월, 퇴직 후 6개월 쉬었으니 딱 적당히 쉬고 출근하는 셈이다. 감사할 일이다.
欲致魚者先通水(욕치어자선통수)
欲來鳥者先樹木(욕래조자선수목)
‘물고기를 이르게 하고 싶은 자는 먼저 물길을 통하게 하고, 새를 오게 하고 싶은 자는 먼저 나무를 심어라.’
회남자(淮南子, 중국 전한의 회남안 유안이 저술한 책)에 나오는 한자성어이다. 어떤 것을 얻으려 한다면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고 준비하고 있으면 원하는 것은 저절로 얻게 된다는 교훈이다.
남편은 그동안 열심히 해온 영어를 인정받아 일하게 되어서 무엇보다 기뻐한다. 3년 전부터 하고 싶어 했던, 목표로 했던 자리이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 논 덕에 경력이 없음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경력은 그동안 직장에서 쌓아온 지휘력으로 잘 해나가리라 믿는다. 남편은 요즘 영어공부를 입시생처럼 더 열심히 한다. 일하는데 필요한 공부이다.
퇴직 후 여행도 하고 집에서 편하게 쉴 때도 어두운 터널 속이었다는게 지금 느껴진다. 불안하고 힘든 시기였는데 슬기롭게 잘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한다. 바빠서 남편과 함께 있어주지 못해도 잔소리 한번 안 하고, 귀가가 늦어도 빨리 오라는 문자 한번 하지 않은 남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사함을 느낀다. 새로운 직장은 남편이 좋아하는 일인 만큼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리라 믿는다. 능력 위에 행운도 항상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