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와서 주어를 사용하기까지 나는 언어의 장벽 이상을 넘어야 했다.
다수의 여느 유학 준비생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불어 문법만 파다가 프랑스에 왔다. 수능 공부하듯 열심히 암기해 왔는데, 정작 입 밖으론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프랑스인이 말하는 문장들은 물처럼 흘러갔고, 거기에서 난 단어 하나 건져내기 조차도 힘들었다. 콧소리를 빵빵 내는 이들의 목소리도 낯설었고, 파란색, 녹색, 회색, 캐러멜 색 가득 담고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도 사람 눈처럼 여겨지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입 밖으로 말이 나와야 하는 모든 순간과, 그들이 나에게 건네는 말을 알아들어야 하는 모든 순간이 곤욕스러웠다. 그러다 드문드문 단어를 내뱉기 시작했지만, 나는 문장을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단어를 내뱉기 시작하고, 그들의 말에서 단어를 잡아낼 수 있는 수준으로 귀와 입이 뚫렸음에도 문장 말하기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주어를 쓸 줄 몰랐다.
한국말에서는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주체가 '나' 일 경우에는 더더욱이 그렇다. 일일이 '나는 점심 먹었어.', '나는 옷을 샀어.', '나는 재미있었어.'라고 주어를 붙이지도 않을뿐더러, 이렇게 주어를 붙이면 의미도 달라진다. 마치 '너는 어떤지 몰라도/너는 아니라지만, 나는 그랬어.'라는 식의 의미가 첨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불어는 그 '나는'(je : 쥬)이라는 주어를 꼭 써줘야 한다. 더구나 불어에서 주어가 길어질 경우 비인칭 주어로 진짜 주어를 대체해서 쓰고, 긴 주어는 문장의 뒤로 빼주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한국말과는 너무 다르다. 예를 들어서, 한국말로 "어제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안경을 끼고 있던 사람이 내 사촌 오빠야.'라는 문장을 보면, 주어절이 문장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불어에서 이런 문장은 없다. 불어에서 주어절이 이렇게 길어질 경우 다른 방식으로 주어를 짧게 대체하고 문장을 일단 시작해야 한다.
내 입에서 한 문장이 나오기까지 나는 어떤 주어를 시작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긴 주어를 비인칭으로 대체하는 데까지는 아직 능력 부족이었기 때문에, 처음 한참 동안 특히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주어로 '쥬'를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든 생활 속에 '내가' 도처에 존재했다. '초콜릿이 먹고 싶어'라고 하면 편할 것을 '나는 초콜릿이 먹고 싶어'라고 말해야 할 때, 마치 나의 존재와 나라는 인간의 영향력이 두배로 커지는 것 같기도 했고, 존재하지 않던 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보고 같이 외출을 하자고 해도 '응, 그러자.'로 끝나지 않고, '응 나는 그러고 싶어.'라고 말해야 할 때마다,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확실히 알려야 하는 게 맞는지 너무나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마치 내가 지나친 개인주의자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여느 땐 이기주의자처럼 느껴졌다. 문장이 서툴러서 짧은 문장을 나열하면서도 '나는'이라는 주어를 연속해서 반복해야 할 수밖에 없었을 때, 나는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기도 했다. 마치 '나'란 존재를 좀 알아달라고 하루 종일 수없이 외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도 익숙하지 않았던 걸까?
나의 이런 노고를 말했더니, 한 철학가 아저씨께서 말씀하시길, 한 일본인 예술가 친구가 있는데, 그 여자는 주어 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예 포기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문장엔 주어가 없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문장이 없어도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참 괴짜다.
17년 차 프랑스 살이가 되다 보니, 내 한국어 문장에는 자연스레 주어가 많아졌다. 내가 주어를 꼭꼭 챙겨 쓰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론 주어를 쓰지 않기 위해 의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종종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는데, 한국말로 상대와 대화를 할 때, "그래서 그게 누가 그랬다는 거야?"라는 식의 질문을 자주 던진다. 상대가 말하는 문장에서 주어가 빠진 경우, 문맥상 그 주체가 누구인지 찾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간혹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17년 전의 그 어렵던 '나'와는 많이 달라졌구나라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