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고인이 되신 전수천 작가를 떠올리며...
작가 전수천은 1947년 소도시 정읍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제적인 이유로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백마사단의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마련한 돈으로 이후의 일본 수학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쌓는다. 1973년 일본 도쿄 무사시노 예술 대학에서 그는 생애 첫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된다. 이미 그의 나이는 30대를 향하고 있었다. 1978년 같은 학교에서 서양 미술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곧바로 도쿄 와코 종합 대학에서 예술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수여받는다. 졸업 해인 1981년 도쿄 키오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데, 이 개인전은 생애 첫 국외 개인전이자, 1976년 서울에서의 생에 첫 개인전 이후 두 번째 개인전이기도 하다. 학업과 생계를 동시에 책임져야 했던 그는 일본에서 머무는 7년 동안 공사 현장에서 작업인부로 푼돈을 벌었다. 중노동을 하더라도 거리에 나앉아 그림을 그려 파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림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의 작품 활동이 이목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미국에서도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1983년 전수천이 36살이 되던 해, 미국의 맨해튼 하층부에 위치한 소호를 향해 떠난다. 6개월을 기획하고 떠난 미국행이었지만 결국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전수천은 당시의 소호를 침울하고 더럽고 무서운 곳이었다고 떠올린다. 1970-80 년대에 이 지역에 많은 갤러리들이 들어오면서 도시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지만, 그 바로 직전인 1960년대의 이 지역은 '버려진' 곳으로 인식될 만큼 암울한 곳이었다. 산업 지구로서 개발이 시작되면서 많은 현대식 건물들이 우후죽순 이 지역에 들어서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도시 계획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개발이 지연되기 시작했고, 도시의 건물들은 주인을 잃은 채 텅 빈 상태로 스산하게 거리를 메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위험 지구로 불리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며, 아무도 찾지 않는 이 곳에 갈 곳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작업할 공간을 찾아 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주거 목적이 아니라 산업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건물의 내부는 주로 높고 탁 트인 넓은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작업실로 쓰기에 제격인 조건이다. 게다가 싼 임대료를 대고 공간을 쓸 수가 있었으니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이렇게 도시는 점차 예술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인물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예술가 백남준 역시 전수천의 이웃이자 동료로서 소호에 머물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당시 백남준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굿 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rwell (1984)을 전파시키며 세계적 무대에서 미술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작가로서의 위상을 유감없이 떨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