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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Apr 23. 2021

인종 차별에 대하여 I.

파리의 차이나 타운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그 동네에 자주 갔었다. 하루는 친구랑 걷다가 아이스크림이 하나 먹고 싶어 졌다. 학생 때라서 단돈 백원도 아껴 쓰던 시절이었다. 길가의 구멍가게는 주로 아랍계열 사람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아랍 가게가 아니고서라도 아이스크림을 낱개로 살 때는 상자로 사는 것보다 더 비싸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서 주인에게 아이스크림 가격을 물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곳은 간혹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가게 밖에 내놓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에는 주로 냉장고를 열쇠로 잠가놓는다. 가게 안에 있던 주인이 나와서 열쇠로 냉장고 문을 열고 내가 지시하는 아이스크림이 얼마라고 가르쳐 줬다. 조금 과장하자면 초코맛 아이스크림 봉지 하나가 마트에서 네 개짜리 한 상자 값과 맞먹었다. 다음에 오겠다고 인사를 하며 가게를 지나가려는데, 뒤에서 한마디가 들렸다. '중국 놈들은 꼭 저래!' 친구는 인종 차별이라고 기분 나빠했다. 나는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다. 차이나 타운에 자리 잡고 있는 아랍 구멍가게 주인이, 더워 죽겠는데 장사는 안 되고, 가격이나 묻고 가버리는 사람한테 퉤 하고 던진 말 정도로만 느껴진다. 내가 중국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기분이 좀 달랐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은 해본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했다. 프랑스 시댁 가족들과 남편의 친구들 여럿이 함께 한국행을 했다. 여행가방을 준비하면서 한 친구가 물었다. 한국에 휴지도 있냐고. 종이를 구겨서 뒤처리를 하는 나라인 줄 아는 건가 하는 생각에 그 말이 괘씸하게 들렸었다. 주변에 즐비한 삼성 자동차부터 가전제품들의 국적이 한국 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도 어쩌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쯤이면, 인종차별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 더 서글퍼진다. 설명인 즉 이렇다.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봤다기보다,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 나라이다 보니 뭔가 그들만의 다른 문화가 있고, 그에 걸맞은 그들만의 수단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는 것. 그럴싸한 핑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친해질수록, '아, 쟤네도 우리랑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저 나라를 마치 미지의 세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미국을 갈 때와, 인도를 갈 때 싸는 짐 가방에 좀 다른 생필품을 챙기고 싶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열댓 명의 프랑스인을 이끌고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 꼬마들이 들러붙었다. 'Hello`와 `Hi`를 남발하며 인사를 했다. `미국 사람이다!`라며 달려와서는 동물원 원숭이 보듯 신기해하면서 쫓아다녔다. 아이의 표정은 한없이 천진난만하고 악의가 없었지만 유독 그 당시 시아버지는 언짢아하셨다. 자신은 프랑스 사람인데 미국 사람 취급을 한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난 미국 사람 아니야! 프랑스 사람이야!`라고 연신 질러대셨지만 아이들은 시아버지의 언짢음과는 상관없이 천진난만하게`우와!' 소리를 내거나 프랑스인이라는 말에 오히려 더 신기해했다. 시아버지는 헬로 헬로 거리는 아이들을 붙잡고 너 왜 나에게 인종차별을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으셨을까? 프랑스 사람들 중에는 미국 문화를 자신들의 것보다 상대적으로 미개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프랑스인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강했던 시아버지 입장에서는 미국인으로 취급받은 것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 일 수도 있다. 미국 사람 취급을 받고 기분 나빠하는 것과, 중국사람 취급을 받고 기분 나빠하는 것. 어디까지 인종 차별이라고 여길 수 있고, 어디까지가 무지에서 온 것이라고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은 어떤 마음일까?


한국에서는 외국인이 눈에 띈다. 물론 소도시에 가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파리를 거닐고 있으면 프랑스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게 느껴질 때도 많다. 외국인인지 현지인인지가 별로 중요치 않다. 처음에 프랑스에 왔을 때는 나를 외국인 취급을 해주지 않는 이들이 야속했었다. 누가 봐도 동양 사람인 내가 뻔히 외국인인 줄 알면서 불어를 천천히 말해주지 않는 것이 마치 말을 알아먹지 못하는 나를 약 올리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내가 뻔히 외국인처럼 생겼는데도, 나를 붙잡고 길을 묻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외국인처럼 생겼다는 것도 나만의 생각이었다.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땐, 백인은 프랑스인, 유색인종은 외국인인 것처럼 보였었다. 다양한 문화가 섞여서 다양한 인종이 비빔밥처럼 어울려 사는 이 나라에서는 생김새가 외국인인지 현지인인지를 가늠하게 하지 않는다. 백인 이어도 외국인이기도 하고, 동양 사람처럼 보여도 현지인이기도 하다.


내가 인종 차별을 뚜렷하게 느꼈던 곳은 경시청에서였다. 외국인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년 경시청에 가서 체류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특별히 내가 타깃이 된 적은 거의 없었지만, 경시청에 가 있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몽땅 인종 차별의 대상임이 느껴진 적은 많이 있다. 경시청의 시스템은 우리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곤 했다. 약속 시간이 각자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나와 길바닥에 줄을 서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어 있어야 했기도 했고, 경시청 안으로 들어가면 언제 제 이름이 불릴지 모르는 사람들의 무리가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경시청 창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를 향한 언행이 무례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불어가 짧은 어린 학생들이 그 무례함의 타깃이 되어 쩔쩔매는 경우를 본 적도 많이 있다. 그때마다 가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당시 경시청의 상황은 체류증이나 신청하러 온 외국인이 누군가를 돌봐줄 여유를 가질만한 곳이 아니었다. 10년 만에 다시 간 요즘의 경시청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내가 학생 때만 해도 경시청 가는 날은 정신력을 완전 무장해야 하는 날이었다.


경시청도 이제 제법 들락거려봤고, 프랑스 살이도 이제 몇 년이 지나서 그전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경시청에 갔던 날이었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는 나의 작은 행동들을 트집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경시청에서 일처리만 빨리 끝내고 나가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꾹꾹 눌렀다. 내가 어눌하게 받아준다고 생각이 되었는지 카운터의 여자는 점점 더 무례해졌다.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구는 그 여자를 더 이상 가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여자에게 이름을 물었다. 여자는 의아해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무례해서 기분이 나쁘고,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겠다고 얘기했다. 민원을 넣고 싶으니 당신의 이름을 말해 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여자가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흔들림 없이 쳐다보는 나의 눈빛이 이제야 보이는 듯했다. 나는 단호했다. 여자는 나의 단호함을 이겨낼 수 없었는지, 팸플릿을 하나 건넸다. 결국 그녀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나는 보란 듯이 천천히 나의 템포를 유지하며 창구가 나란히 있는 쪽으로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향했다. 조용한 공간에 울리는 서둘지 않는 나의 구두 소리에 그녀의 심장이 쿵쾅대기를 바랐다. 그리고 한 창구 앞에 서서 저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카운터에 있는 여자의 무례함에 대해서 간략히 말했다. 무례한 여자가 내 앞 창구에 서있는 여자를 토끼눈을 하고 곁눈질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동료는 토끼눈을 한 여자와 나를 번갈아 보며 나에게 이름을 말해 줄 수는 없다고 눈치 보는 말을 했다. 그녀는 나와 자신의 동료 모두에게 정중했다.


밖으로 나왔다. 억지로 밟았던 느린 템포가 풀리고, 촌스럽게 손이 덜덜 떨렸다. 다음번에 내가 왔을 때는 당신이 좀 더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나온 차였다. 처음과는 다르게 입도 벙긋 못하던 여자에게서 아까 받은 팸플릿을 그제야 열어봤다. 민원 넣는 종이라며 얼버무리며 나에게 건네준 종이를 아까는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나와서 보니 민원은커녕, 경시청 소개 팸플릿이었다. 저 여자가 겁을 먹기는 먹었었구나가 느껴져서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연민이 느껴졌다. 싸워서 이길 마음은 없었다. 단지 그 여자가 자신의 행동을 각성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경시청에 오는 사람들은 체류증을 받아야지만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경시청에서 외국인들을 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치 그들이 우리를 이 땅에 살 게 하는 특혜를 내리는 자들인 양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평소에는 큰소리 잘 치던 외국인들도 그곳에만 가면 제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경시청에서 체류증을 신청하거나 받으러 온 사람 치고 제 목소리를 떵떵거리며 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경시청 사람들은 우리가 목소리를 낼 겨를을 주지 않았다.


인종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나의 존재 자체가 발길질당한 기분이 든다. 인종 차별이라는 문제는 나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게 느껴진다. 상대가 나에게 한 행동이 인종 차별이건 그 무엇이건을 떠나서, 나를 기분 나쁘게 한 데에만 초점을 맞추면 해결이 조금 더 간단해진다. 상대는 타당한 이유 없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할 권리가 없으며, 나는 내가 상대로부터 부당함을 느꼈음을 표현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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