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sun Leymet Apr 05. 2021

학창 시절, 존재에 대한 고민

            어릴 적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아이 었다. 고등학교까지 올 개근을 했고, 숙제를 꼬박꼬박 해갔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에 담임 선생님께서 열개의 숙제를 내주셨기에 해 갔다. 개학날 선생님은 숙제를 다 한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다. 아이들이 먼저 들면 나도 나중에 들려고 기다리다가 결국 손을 들지 못했다. 명랑했던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싱글벙글 이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던 사이, 숙제는 그 아이만 해 온 것으로 되어버렸다. 모두 박수를 쳐줬다. 거의 모든 친구들이 숙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느라 박수를 치면서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는 않았다.


            초등학교를 세 군데를 다녔고, 중학교는 매 학년마다 다른 도시에서 다른 학교로 옮겨 다녔다. 고등학교가 되어서야 한 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전학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존재감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그동안 수시로 적응해야 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일까? 겁이 많았지만 프랑스로 가기로 했을 때에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프랑스에 오고 보니 나만한 겁쟁이가 없었다. 밤 9시가 넘어가야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에도, 나는 오후 5시 이후에는 되도록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겁 많은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카멜레온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평범함 속에 묻혀 버리면 조금 안전할 것 같았다. 동양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존재가 너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이 불편했다.


            대학생 때 나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책벌레들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보도 듣도 못한 철학 책들을 읽어댔고, 그들은 자신들이 사유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재미있었다.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좌우로 돌리며 관객이 되어 있는 나의 존재가 그 속에서 폐가 될까 싶었다. 방학이 되었다. 친구들의 입에서 나왔던 모든 책들을 찾아 읽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대로 돌아 누워 읽기 시작했다. 방학 내내 이해가 되지도 않는 수십 권의 책을 읽어 재꼈다. 개강을 했다. 나는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라는 책에 대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다. 사유보다는 느낀 점이었다. 한 친구가 제목을 받아 적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드디어 이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들 사이의 나의 존재가 안심이 되었다.


            나는 당시 미술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입학하는 순간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허를 찔렀다. 교수님들은 학생들에게 자신으로부터 나오라고 끊임없이 주문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나에게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매일마다 고민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과제로 어떤 작업을 해가도 그 안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내가 너무나도 무겁게 존재했다. 그러나 나는 이 시기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평범함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한 존재로서 이제야 태어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난 예민하고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항상 불편한 아이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참 끈질겼다. 스무 살, 나를 그제야 태어나게 했던 이 물음은 시간이 갈수록 사사건건 나에게 싸움을 걸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책을 뒤져도 대답이 들어있는 것 같지 않았거나,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존재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이상 살수도 죽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수건을 하나 챙겨서 방구석에서 벽을 보고 돌아 눕곤 했다. 벽지에 모레알 크기만 하게 돌기처럼 난 무늬를 손톱으로 하나씩 떼어냈다. 머릿속에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만 가득했지,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질문이 거듭될수록,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데는 두루마리 휴지보다 수건이 좀 낫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존재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 않는 것이나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너무나 무거웠다.

작가의 이전글 지긋지긋한 착하다는 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