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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공포가 아닌 존재감의 영화

by MITCH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창조 이야기를 다시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오해였는지를 보여준다. '델 토로'는 괴물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지만, 이번에는 그를 공포의 존재로 두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처음 본 존재로, 모든 감각을 새로 배우는 생명으로 등장한다. 눈을 뜨자마자 느끼는 공기, 손끝에 닿는 온기,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라는 사실을 깨닫는 존재. '델 토로'가 보여주는 괴물은 그렇게 세상에 들어온다. 피와 봉합선으로 조립된 몸이지만, 그저 잔혹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정성스럽게 디자인한다. 인체 해부 장면은 충격이 아니라 질감으로 다가오고, 고통이 시각적 조형처럼 느껴진다. '델 토로'는 피를 흘리는 법보다 피를 조형하는 법을 아는 감독이다.

게다가 <셰이프 오브 워터>, <크림슨 피크> 때처럼 광원과 질감의 조합이 이루어졌다. 괴물의 얼굴 근육이나 눈빛에까지 따뜻한 톤과 차가운 톤이 섞여 들어가는데 어떤 장면에서는 괴물처럼, 어떤 장면에서는 살아있는 존재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리고 음악 역시 훌륭하다. 클래식 오페라 구조를 끌어오며 바이올린이 아닌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중심에 깔리면서 묵직한 감정선을 만들어냈다. 때문에 극장에서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철저히 시상식 출품을 위한 극장 개봉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닌 곳에서, 넷플릭스를 통해 봤다면 그 음향의 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다. 괴물의 숨결이 있음에도 그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공간에서 이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꽤 아쉬운 일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매번 오래된 신화를 다시 쓰고 있지만, 매번 괴물을 통한 질문은 달랐다. 원작이 "신의 자리를 넘본 인간의 오만"을 다뤘다면, 그 후의 미디어믹스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부정적 존재인 괴물에게 그 시대의 불안을 상징적을 덧씌워왔다. 하지만 '델 토로'는 괴물에게 "살아있는 존재가 느끼는 외로움"을 부여한다. 그는 더 이상 흉측한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하나의 생명으로 등장한다. 인상 깊었던 건 '숲의 정령'이라는 짧고 단순한 호칭 하나가 그에게 생겼을 때다. "그것"이나 "괴물"이 아닌 이름이 생기는 순간, 그는 존재해도 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애정을 배우고, 쓰다듬는 손길을 그리워하며, 자신도 그런 사랑을 흉내 내는 존재. 마치 <늑대소년>의 '철수'처럼 말이다. 그는 밤마다 몰래 나무를 해놓고, 울타리를 고쳐 놓는다. 세상이 그를 거부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존재한다. '델 토로'는 그 장면을 통해 괴물을 세계로부터 구원한다.

'델 토로'는 괴물을 통해 인간을 본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괴물이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살아 있으려 하는지를 묻는다. 그 물음에는 신도 과학도 없다. 그리고 괴물이 아름답다. 그는 완벽하게 비례 잡힌 신체, 차분한 눈빛, 고요한 목소리를 지녔다. 마치 인공의 이상형처럼 보인다. 이번 <프랑켄슈타인>에는 여성 크리처도 등장하지 않는다. '델 토로'는 여성을 남성의 욕망이나 실험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다. 대신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 창조의 책임보다 존재의 감정에 포인트를 둔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델 토로'가 오랫동안 써왔던 "이해받지 못한 존재들"의 연장선에 있다. 그의 영화에서 괴물은 세상을 파괴하지 않는다. 괴물은 존재의 결함이 아니다. '델 토로'는 괴물을 통해 인간의 정의를 확장하고, 괴물에게 실패가 아닌 존재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전 세대의 괴물들은 언제나 봉합의 흔적, 죽음의 냄새, 인간이 아닌 것의 상징이었지만 '델 토로'의 괴물은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닿으려다 만들어낸 아름다운 비극일 뿐이다. 이번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그래서 새롭다. 그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팟캐스트 : https://dlink.podbbang.com/051faa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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