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는 보통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악인지 밝혀내는 과정에서 쾌감을 준다. 그래서 대부분의 스릴러는 결말이 명확하다. 악은 단죄되고, 피해자는 정당성을 되찾고, 관객은 안도한다. <자백의 대가>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사건이 중심에 있는 것처럼 굴지만, 이 드라마가 끝까지 파고든 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초반에는 플롯이 눈을 끈다. 누명, 억울함, 파국, 수사, 반전. 장르적 쾌감의 조건들이 다 들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관객의 관심이 "누가 범인인가"에서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 사건이 두 여자를 어떻게 파괴하고, 어떻게 연대하게 하고, 결국 어디까지 내모는가에 집중한다. 사건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사람이 중심이 된다. 이 전환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자백의 대가>는 사건 스릴러가 아니라 감정 스릴러가 된다.
'윤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던 인물이다. 사건으로 인해 삶이 붕괴되지만, 그 붕괴 이전에 분명히 존재하던 세계가 있다. 따라서 '윤수'의 동기는 복수가 아니라 복구다. 무죄를 증명하고 진실을 밝히는 일은 분노의 실행이 아니라,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생존 방식이다.
반면 '모은'은 시작부터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사건 이전부터 삶의 기반이 붕괴되어 있고, 지켜야 할 대상이나 복구해야 할 세계가 없다. 그녀의 행동은 삶을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목적을 소진하는 방식에 가깝다. 복수는 목적이라기보다 기능에 가깝다.
이 드라마는 잔인할 만큼 명확하게, 소진되는 서사를 가진 인물과 회복되는 서사를 가진 인물을 나눈다. 이미 무너져 있었고, 되찾을 것이 없는 인물은 결국 목적이 끝나면 삶도 함께 끝난다. 이 드라마에서 생존은 구원이 아니다. 반대로 되찾아야 할 삶이 있고, 지켜야 할 세계가 있는 인물은 살아남는다. <자백의 대가>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 대비가 두 인물의 운명을 갈랐다.
<자백의 대가>는 사실이 밝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건 중심의 스릴러가 아니다. 진실의 폭로를 결말이 아니라 과정으로 둔다. 사건이 해결된 이후에도 통쾌하지 않은 이유는 서사의 방향성이 정의의 회복이 아니라 감정의 후유증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플롯의 세부 정보는 흐려질 수 있지만, 인물에게 남은 감정의 잔류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작품이 대중적 스릴러의 공식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높은 완성도를 남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