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 장치 없이도 정확하고 날카롭게
'짐 자무쉬'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가족이 화해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화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극으로 몰아가는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왜 늘 어정쩡하게 남는가"를 세 편의 이야기로 조금씩 보여준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머뭇 거린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가까워질 수 있지만 서로 원하지 않는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가까워지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세 가족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족관계가 시간과 선택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지 세 단계로 펼쳐 놓은 것이다. 플롯은 이어지지 않지만, 감정만은 한 가지에서 세 갈래로 뻗어 있다.
영화 속 가족들은 밥을 먹지 않는다. 대신 물이나 커피, 차를 마신다. 식사는 정서적 친밀이 필요하지만 음료는 침묵을 버티는 정도면 충분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마음까지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마시는 행위는 감정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감정을 덮는 시간이다. 말이 막히면 마시고, 불편하면 마시고, 감정이 터질 것 같아도 마신다. 서로에게 화를 내지도, 울지도, 붙잡지도 않고 그냥 버틴다. 대부분의 가족 갈등은 폭발보다 버티기로 지나간다는 사실을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포착한다. 영화 속 침묵들은 감정 회피가 아니라 감정 누적의 결과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은 사랑이 없어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표현이 서툴러서, 서툰 날들이 쌓여서, 풀어보기도 전에 시간이 흘러서 멀어진 결과다. 첫 번째 이야기의 아버지와 자식들은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두 번째의 어머니와 딸들은 서로를 알면서도 외면한다. 세 번째의 남매는 드디어 말할 준비가 됐지만 듣고 받아줄 부모가 없다. 말이 붙을 만한 상황인데도 한 마디가 쉽지 않고, 눈치만 오가고, 반가움보다 어색함이 먼저고, 마음보다 체면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들이 애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애정보다 머뭇거림이 더 큰 사람들이다. 이 영화 속 부모와 자식들은 사랑할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줄도 모른다. 좋아하면서 어색하고, 그리우면서 어색하고, 미안하면서 어색하다.
세 이야기마다 반복되는 상징들이 있다. 빨간 옷, 마시는 행위, 스케이트보드, 롤렉스 시계, 영국식 농담 같은 요소들. 상징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패턴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반복이다.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노력하지만, 결국 또 비슷한 자리로 돌아온다. 이 반복은 허무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래서 영화의 핵심은 화해의 부재나 감정의 결핍이 아니다. 가족이란 관계는 끝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우리는 평생 서로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고, 가까워질 기회를 놓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말을 꺼낼 용기가 생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거나 설교하지 않고, 그냥 보여준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특별한 비극이 아니라 대부분의 가족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가족의 실패가 얼마나 보편적인지 말해주는 영화다.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화해가 있고,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화해도 있고,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화해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가족은 한 번은 더 만나고 싶어 한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차 한 잔쯤 마시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이 이 영화 속 가족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가족은 성장하는 관계가 아니라 평생 감당해 나가는 관계다. 이 문장을 알고 보는 사람과 모르고 보는 사람의 영화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