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없는 선의가 남긴 혼란, 배드 포츈
<굿 포츈>은 천사가 인간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책임지지 않는 상위 존재가 인간의 삶에 개입할 때 얼마나 쉽게 혼란이 만들어지는 가다. '가브리엘'은 천사랍시고 이미 방향을 가지고 버티고 있던 '아지'를 일부러 흔들고, 삶을 뒤섞고, 정체성을 붕괴시킨 후 "그래도 좋은 거 배웠지?"라는 말과 함께 빠져나간다.
영화가 설정한 대비는 노골적이다. 인도계 이민자이자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아지'와 백인이고 부유하며 단단한 안전망을 가진 '제프'. 이미 극단적인 조건으로 출발한 이야기는 "서로의 인생을 살아봐서 서로를 이해했다"라는 감정적 합의로 정리된다. 하지만 이 체험은 철저히 비대칭적이다. '제프'의 체험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관광이었고, '아지'는 삶의 손실을 대가로 치른다. 그래서 '제프'가 얻는 것은 성장이라기보다 어쭙잖은 동정심이고, '아지'가 얻는 것은 각성이 아니라 체념에 가깝다. 이해는 생겼을지 모르지만, 관계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는다. 대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편안한 상태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선택한 건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더 견딜만한 삶이다.
특히 '제프'가 마지막에 배달 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알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위선을 집약한다. 고통은 당사자가 겪어야만 이해된다는 논리는 공감이 아니라 권력자의 면죄부에 가깝다. 더구나 그는 얼마나 겪었는지도, 그 변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도 증명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만 남길뿐, 구조는 그대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끝까지 분노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라면 '가브리엘'을 고소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을 텐데, 누구도 화내지 않는다. '아지'는 그저 착하기만 하고, '제프'는 어떤 죄책감도 오래 끌어 안지 않으며, '가브리엘'은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영화는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공정을 흔들지는 않는다. 대신 개인이 그 안에서 마음을 정리하는 법을 보여줄 뿐이다. 질문은 쏟아지지만, 그 질문들을 해결할 싸움은 없다.
이 영화가 묻는 것은 왜 바뀌지 않는가가 아니라, 바뀌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다. 그래서 "그래도 네 인생은 네 인생대로 의미가 있고, 지금 자리에서 행복하면 된다"식의 결론은 불평등의 부담을 개인의 마음가짐으로 되돌린다. 강자는 조금 착해지면 성장하고, 약자는 욕망을 내려놓으면 성숙해졌다고 부르는 프레임. 나쁘지 않게 영화를 봤지만, 묘한 공백이 남는다. 이 영화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말한 것들보다 더 선명하게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