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이야기- 조은하
언제나 저는 위인전 보다 동네 친구들과의 술래잡기, 신기해 보이는 가게에서 만난 사장님들과의 짧은 이야기들로 인생을 배워왔습니다. 불확실성과 불안함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세상 밖으로 더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우리 30분만 이야기합시다.
2022.04.01, 14:00 이촌 헬카페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두 달 전 영국 여행에서다. 일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다, 모든 걸 멈추고 여행하며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 하였다.그녀와 나의 여행은 한 달 전에 끝났다. 어쩐 일인지 우린 여전히 여행하고 있는 것 같다. 헤매고 또 발견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지금 꼭 담고 싶었다.
Q. 요즘 어떻게 지내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궁금하다.
일을 그만두고 떠난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 막막하게 지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다니고 못 만났던 사람들 만나면서 여행에서 뭘 했는지 얘기를 하는데, 지금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내가 과거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서 스스로가 느끼는 내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더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잃은 느낌. 표지판도 없는 평야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다. 한 발을 떼어야 하는데 그저 서 있는.
그러다 어제 한 친구를 만났는데, 취미 활동이 아니라 비즈니스 관점으로 하나에 집중하고 나아가는 게 필요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렇지 않으면 노동이나 생산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취미생활에 그치지 않을 거라고. 그 이야기가 많이 와닿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것을 고민하는 단계에 있다.
Q.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을 하기 전과 후 삶의 변화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변화인가 궁금하다.
한 독서모임에서는 멤버로, 다른 한 독서모임에서는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독서모임에 참여한 지는 일 년 정도 됐고, 운영자로 활동한 것은 올해 초부터이다. 전문분야인 광고 일을 하고 관련된 책들만 있었을 때는 사람들과 만날 때 피상적인 이야기만 하게 되더라. 독서 모임을 통해 책을 읽고, 직접 만나진 못해도 온라인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고민과 관점을 나눌 수 있는 점이 정말 좋았다.
책을 읽고 나서는 가지런히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로 깨닫게 되고 유연해지게 되었다. 어딜 가지 않아도 계속해서 자극을 받으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Q. 어떤 것이 당신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나.
어릴 적부터 서울대,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였다. (서울대는 아니지만) 대학을 가니까 목표가 사라졌다. 졸업 후에는 취업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취업을 하고, 또 취업 후에는 일을 배워야 하니까 거기에 집중하고. 그렇게 취업 후 17년 동안 늘 미래를 걱정하면서 지내왔다. 그러다 지금은 잠시 멈췄다. 그런데 목표가 없어지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러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책을 만났다.
지금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과거를 후회하는 할 시간도 아깝고, 미래를 걱정하는 시간도 아깝더라.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내면 계속 그 다음날을 살게 하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Q. 최근에 가장 현재를 잘 지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나.
최근에 공주 여행 갔을 때. 몰랐던 곳에 가서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사람이던, 환경이던, 책이던 무언가에 몰두하면 다른 건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현재에 충실하고 싶어서 돌아다니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Q. 본인의 인생을 드라마로 본다면, 현재 이 시기는 어떤 부분인가? 좋고 나쁨을 제외하고 표현해 봐도 좋다.
지금은 반전 부분에 있는 것 같다. 똑똑하고 일 잘한다는 소리만 듣고 살아오던 아이가 그전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절정 후 꺾이는 부분. 과거의 나는 사회의 주류로 살아오면서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잘나가는 딸이자 이모이자 처제이자 동생으로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들이 나에게 그만둬라. 그만해도 괜찮다.라고 먼저 말해주더라. 그건 나에게 큰 반전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나에게 기대한 게 없었던 거다.
Q. 마지막으로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주류 사회에서 살다 뛰쳐나와보니까,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들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그것이 가장 불행하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공부해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을 갖고 있는데, 영어를 잘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잘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스스로 만든 굴레에 자기가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Q. 세상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들었을 때 가장 위로가 되는 말 역시, 괜찮다는 말이다.
그 자체로 괜찮다, 안심이 되는 말이다.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만 들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내가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우린 이촌 아파트 단지를 함께 걸었다.
서울도 이젠 정말 봄이라고 외치는 것만 같은 오후였다. 파란 하늘과 햇볕이 온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을 카메라로 담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서로의 안구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나는 그녀를 만나면 꼭 그 일을 한다. 그녀의 현재들이 만드는 미래가 궁금하다. 그게 무엇이든 조은하라는 사람이 더욱 선명해진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