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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트라 Oct 27. 2024

핑크빛 산티아고 로맨스의 서막

이혼하고 떠난 산티아고에서 진짜 소울메이트를 만났다.

결국 나는 부르고스까지 걷기로 했다.

몸이 너무나 고단했지만 일단은 가기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총 40키로 이상을 걸어야 한다.


부르고스까지 가기로 마음먹은 첫 번째 이유는 그 마을에서 묵고 싶지 않았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을이 아닌 도로가에 덩그러니 있는 마을이었는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번째는 큰 도시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잘 쉬면서 몸도 마음도 재정비하고 싶었다.


세 번째는 무엇보다 일단은 그가 있는 곳까지 가고 싶었다.

물론 그 큰 도시에서, 또 그렇게 많은 알베르게가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내게 이런 마음을 갖게 하는 남자를 적극적으로 찾아서 만나 최소 통성명은 하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란 그가 부르고스까지 간다라는 것뿐이니 만날 확률을 높이려면 내 이 튼튼한 두 다리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그를 좇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르고스까지 걸어가는 길, 슬슬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시내에 들어온 후부터도 무려 4키로를 더 걸어야 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고, 무척이나 고행이었다.

중간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벤치에 누워 신발을 벗고 하늘을 바라봤다. 헛웃음이 났다.

이혼하고 인생을 되돌아보겠노라 하며 까미노를 걷자고 와놓고선 잠깐 본 남자한테 정신이 팔려 몸 아픈지도 모르고 무조건 직진하는 내 모습이 내가 봐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하지만 부르고스에는 알베르게를 포함한 정말 많은 숙소가 있기에 그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같은 숙소에 묵더라도 마주치리라는 보장도 없고.

늦은 시간이어서 혹여나 베드가 없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내 몸 하나 누윌 자리는 있었다.

오늘 걸어온 거리를 살펴보니 무려 43km였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며 아까 만난 그 남자를 생각했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을 최대한 높이는 것에 최선을 다했고, 이다음은 흐름에 맡기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이런 감정과 열정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다행이었다.






빨래를 들고 1층 세탁실로 내려갔다.

빨래를 돌리고 돌아서는데...

맙소사, 정말로 그 남자를 만나고야 말았다.


나도 놀랐고, 그는 더 놀랐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따라잡는다면서요. 아까 그냥 지나치길래."


그랬더니 그는 어버버 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친구들하고 같이 밥 먹는다고 늦었어요. 그리고 그쪽이 부르고스까지 못 갈 거 같다고 했어서 아까 마주친 그 마을에서 묵는 줄 알았어서 손만 흔들었는데... 아니 그런데 어떻게 이래 빨리 걸어왔어요??!!?”


내가 엄청 빠르게 걷긴 한 모양이다.

하긴 땅만 보고 미친 듯이 걷긴 했다.

하지만 널 만나러 내가 이 악물고 걸어왔다고 말할 순 없으니

“저 그냥 차도 따라 걸어왔는데요.."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하셨어요?”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아니요. 아직. 이제 막 왔어요.”


나는 직진한다.

“그럼 저랑 저녁 드실래요?”


그가 막 웃더니 대답한다.

“잠시만요, 저 친구들한테 그럼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6월이지만 이상한 날씨였다.

그와 나는 슬리퍼에 반바지, 유니클로 경량패딩을 하나씩 걸치고

함께 부르고스 시내로 걸어갔다.

아직 시에스타 시간이 남아 대부분의 식당들이 문을 열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 맥주나 한 잔 마시자며 광장으로 걸어갔다.


또다시 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나는 말한다.

“우산 가져올까요? 아 그리고 빨래도 널어놨는데.. ”


“금방 그칠걸요? 여기서는 이 정도 비는 우산 잘 안 써요. 그리고 건조해서 빨래도 빨리 잘 마르고,

비 좀 맞아도 한국에서처럼 꿉꿉하고 비냄새나고 그렇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콩깍지가 벌써 씌어버린 건지 무던한 그의 말이 듣기가 좋았다.


비가 조금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고 테라스에 앉았다.

파라솔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은데, 밖에서 드실 거예요?”

“이 정도는 상관없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고, 눈앞에 있는 온갖 것들 냅킨과 메뉴판 등등 심지어 머리카락도 주체할 수 없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쭈굴한 자세를 취하며

 “아, 안 되겠네요. 들어가죠.” 하더니 후다닥 실내로 들어갔다.

그 상황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허영이 없는 사람인건 확실했다.


급히 들어온 많은 사람들 덕분에 테이블 자리가 없어서 바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맥주 두 잔을 시키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서로의 이름과 나이, 고향을 이야기했다. 그와 나는 동갑이었다.

심지어 생일도 정확하게 1주일 차이가 났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생각이나 가치관, 살아온 방식에 있어서 비슷한 것들이 참 많았다.


특히나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깜짝 놀랐다.

“아, 너도? 야 나도!”  의 말을 끊임없이 했다.


나도 그도 홀로 여행을 하는데 도가 텄다는 것이 일단 큰 연결감이 주었고,

나아가 여행지에 도착하고 그 지역을 돌아다니는 방식, 숙소를 선택하는 기준, 여행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짐을 꾸리는 방법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똑같았다.


내가 한국에 살아서 아시아권을 그렇게 홀로 여행을 했다고 하면, 그는 독일에 살아서 유럽을 그렇게 홀로 여행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맥주집에서 일어나 밥을 먹으러 옮긴 일본 라멘 집에서도, 부르고스 광장 곳곳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우리에게 그 밤의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알베르게는 보통 밤 9~10시 사이에 문을 폐쇄한다.

우리는 10시에 가까스로 알베르게에 들어왔고,

결국 시간이 모자라서 공용 휴게실에 마주 보고 앉아 1유로짜리 캔맥주를 마시며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이와의 대화가 이토록 편안하고 즐거울 줄을 상상도 못 했다.

아니, 편안하고 즐거운 정도가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는 순간순간마다 소름이 끼칠 만큼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날 분명히 우리는 서로 사랑에 빠졌다.

그러니 나는 이야기해야 했다. 나의 이혼을.


그리고 한숨을 깊게 한번 쉬고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지난겨울에 이혼을 했으며,

내가 이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던 5월 30일은 나의 ex결혼기념일이었다는 것.


그러자 그는 내게 꽤나 진지한 얼굴로 나의 결혼기간과 이혼사유에 대해 물었고,

나는 어떤 과장이나 비약 없이, 그렇다고 또 너무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내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 이혼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더니 내 말이 모두 끝나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네. 한국에선 어떤지 몰라도, 여기서 그런 건 일도 아니다. 나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까 기죽지 마라.”

그 대화를 하는 과정과 그의 태도에 나는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그곳엔 버니와 프로즈티 부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있는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다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그들에게 달려가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힘들어서 중간에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이동했다고 말하며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내게 물었다.

"지혜! 저 남자는 누구야? 저 사람과 너, 어떤 기류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나는 말했다.

“정확해! 나 내 오렌지 반쪽 찾은 것 같아!!! “

그들은 마치 딸의 연애를 보듯 나를 꼭 끌어안으며 행복하라고 축복해 주었다.





(좌) 함께 처음 마셨던 맥주, 사랑의 묘약이었나? (우) 그를 만나기 위해 걸은 43.7km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걸어본 거리



그렇게 우리는 새벽 3시까지 손을 꼭 붙잡고 많은 대화를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내일은 또 내일의 길이 있으니 이만 가서 자자며 각자의 베드를 찾아갔다.

어쩐지 벌써부터 그와의 헤어짐이 두렵고 슬프게 느껴졌다.






새벽 3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지만 피로가 쌓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큰 도시인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2-3일 정도는 푹 쉬면서 관광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른 새벽, 3시간 만에 만난 그는 바로 다음 마을로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어쩐지 아쉬웠다.


나는 그에게 하루만 더 부르고스에서 놀다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렇게 확실한 데이트 신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된다. 바로 가야 한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알베르게에서는 나와야 했기 때문에 배낭을 들춰메고 비몽사몽 나오긴 했지만, 그를 따라 다음 마을로 가야 할지 원래 내 계획대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것인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결심도 서지 않아 그와 일단 다음 마을 방향으로 걸었다. 부르고스 시내에 빠져나가는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니 걸으면서 결정할 심산이었다.

한편으로는 왠지 그는 내 데이트 신청을 단칼에 거절했는데, 내가 쫄래쫄래 따라가는 것도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았다. 자존심이 좀 상한달까?


그러나 그를 향한 나의 호감이 자존심을 이겨버렸다.

그는 내게 원한다면 이곳에 있다가 가라고 했지만, 나는 대답대신 그냥 나란히 걷는 것을 선택했다.


속으로 생각한다.

'으이구, 또! 또! 그놈의 사랑!'






그는 걸음이 정말 빨랐다. 마치 군인처럼,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걸음이 느리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아서 예쁘고 신기한 게 보이면, 거기에 멈춰 한참 구경을 한다.

그는 그런 나 때문에 몇 번씩 멈칫하며 나를 기다려주었다.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부담감이 든다. 다음엔 따로 걷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지 않을까? 생각도 하면서.






스페인의 유월은 정말로 더웠다.

물이 부족해서 힘겹게 걷다가 만난 오전 11시경 한 작은 바는 마치 오아시스 같았다.

그곳에 멈춰 아주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사들고, 앞에 있는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그도 나도 “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보고 큰 소리로 웃는다.


이곳을 걷기 시작할 때의 비장함, 쓸쓸함은 온데간데없다. 날씨만큼이나 내 마음도 화창하고 맑다.



맥주를 마시다가 나는 다짜고짜 그에게 물었다.

- 오늘 당장 죽는다면, 넌 뭔가 아쉬울 것 같아?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도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하늘을 한번 바라보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엷은 미소를 띠며 내게 말한다.

- 없을 것 같은데?



그 질문은 내가 늘 마음속에 품고 사는 질문이었다.

특히나 중요한 결정 앞에서 쉽사리 마음이 서지 않을 때면, 스스로에게 늘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늘 죽음 앞에 아쉬움이나 부끄럼없이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내게 알 수 없는 희열과 희망을 주었다.





이어서 나는 나의 지난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어제의 이야기가 여행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하면, 오늘은 평범한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를테면 학창 시절의 이야기, 전공을 선택하게 된 이야기, 졸업을 하고 하던 일을 때려치우게 된 이야기,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흐름에 따라 약 20분 정도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는 내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듯이 단 한 번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경청한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한다. 그의 지난 삶은 어땠을까?


- 내 얘기는 여기까지. 이제 너 얘기도 좀 해보지 그래?


그는 타인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며 운을 떼었지만, 결국 신이 나서 쉬지 않고 나와 비슷하게 이야기했다.


서로를 모르던 시간, 각자의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왔구나.

그의 삶을 더 알아가고 싶었고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고 이야기하는 동안 이미 많은 순례자가 지나간 듯하다.

다시 배낭을 메고, 아무도 없는 까미노를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그렇게 그와 나는 18일 동안 약 550km를 함께 걸었다.








그와 걷는 550km 까미노 내내 생각했다.


- 우리의 감정이 지금 이 상황에 취해 생긴 허상이 아닐까?

- 허상이 아닌 진실된 감정이라면 그것을 언제,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 자격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 그렇다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때와 마음은 어때야 할까?

- 그와 사랑을 한다면 물리적인 거리와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길을 걷는 동안 이 수많은 물음에 그와 나 둘 다,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마치 금기어처럼.


우리에게 최선은 그저 주어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지금 걷고 있는 길, 걷고 있는 몸, 서로 나누고 있는 시간들에 정성을 다해 집중하자고.




둘이 함께 지루하다는 메세타 평야를 지나갈 무렵, 우리에겐 새로운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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