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정녕 내 운명인가요?
밤새 푹 자고 일어난 까미노 11일 차.
크리스티나의 롯지가 있는 마을 Villafranca Montes de Oca에서 길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하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새벽, 많이 잤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열흘간의 긴장이 툭 풀린탓인지 몸살 전조 증상인 듯하다.
'오늘도 무리해선 안 되겠구나, 욕심 없이 걷자'라고 생각한다.
까미노에서 아침에 길을 나서면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아침식사를 할 카페테리아나 바를 찾는 일이었다.
<Buen Camino>라는 어플을 켠다.
그리고 내가 지나갈 마을 간의 거리와 현재 내 컨디션을 체크한다.
공복으로 걸을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해 보고, 첫 식사를 할 마을과 적당한 장소를 선정한다.
평균적으로 그곳까지의 거리들은 7km 내외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정신인지 아침부터 길을 헤맸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무시하고 내가 가는 길이 맞을 거라며 확신한 것이 잘못이었다.
심지어 구글맵을 켜고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길을 잘못 들었다.
도대체 이 무모한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누군가가 '옳다'라고 하는 길을 기어이 거부하고 내가 옳다고 믿는 고집이 아닌 아집을 가진 내게 진절머리가 나는 순간이다.
4km 정도를 헤매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하나 이 작은 마을에 하루를 더 묵는 것도 그다지 좋은 결정은 아닌 것 같아 일단은 다음 마을을 향해 걷기로 한다.
맙소사! 다음 마을까지 무려 12km가 남아있다.
그 말인즉슨 공복으로 16km 이상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허기가 진다.
나랑 같은 마을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이미 한참 전에 출발했기에 길에는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자 울창한 숲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름다운 길이다.
허나 나는 배고픔과 피로감 그리고 자괴감에 그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도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 비가 내리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기온은 뚝뚝 떨어졌다.
나는 우비를 꺼내 입고, 몸에 열기를 내고자 보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에 키가 큰 나무들은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하고,
나뭇잎들은 서로 부대끼며 마치 거친 파도와 같은 소리를 낸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숲에서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하지만 나는 우비를 벗지 않고 그대로 계속 걸었다.
우비를 벗겠다고 배낭을 내려놓고 멈추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관성처럼 그저 앞으로 또 앞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해가 들기 시작하자 몸의 한기도 사그라들고 이내 땀이 날 만큼 몸에 열기가 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비를 벗지 않은 채 걷는다.
키가 족히 190cm는 넘을 것 같은 스위스 아저씨가 내 옆을 지나며 내게 왜 우비를 입고 있냐고 물어온다.
나는 모든 의욕을 잃은 표정으로 '너무 추워서요.'라고 답한 뒤, 빠르게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스위스 아저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를 앞서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얕은 숨을 반복하며 다리를 움직인다. 앞으로 또 앞으로.
걷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다리를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어딘가에 닿겠지, 하며.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다음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정말 반갑게도 바로 카페도 있다.
카페에 들어가자 아까 만난 그 키 큰 스위스 아저씨가 있었다.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부디 말을 걸지 않길 바라며.
나는 배가 몹시 고픈 나머지 충동적으로 4개의 메뉴를 시켰다.
아주 큰 샌드위치와 감자 또르띠야를 하나씩 시켰고 음료도 카페 콘레체와 오렌지 주스 두 개나 주문했다.
스위스 아저씨는 내 테이블에 가득히 놓인 여러 메뉴들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뻣뻣한 샌드위치 빵을 무미건조하게 씹어 오렌지 주스와 함께 꿀꺽 넘겼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느긋하고 속 편하게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샌드위치는 반의 반도 먹지 못했다.
그것이 아까워 챙겨 온 다회용기에 욱여넣었고, 그 무게는 고스란히 내 어깨에 더해졌다.
배고플 때의 선택은 믿을게 못된다는 말에 신뢰가 +3 더해졌다.
어쨌거나 따뜻한 음식과 상큼한 오렌지 주스까지 먹고 나니 비로소 몸에 에너지가 도는 것 같다.
이전까지 죽을듯한 얼굴로 걸었다면, 지금부터 힘차게 걸을 일이었다.
여전히 흐린 날씨이긴 했으나 아까처럼 비바람이 불진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마음은 몸처럼 바로 생기가 돌고 낙관적 이어 지진 않는 것 같다.
순례길을 걸은 지 십일도 넘었지만 쓸쓸하고 슬픈 건 여전했고, 인생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선명해지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에 확신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없다.
모든 것이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날이다.
한숨만 푹푹 쉬어대며, 아무래도 다음 마을쯤에서 쉬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체념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그 순간, 누군가 옆을 스쳐가며 말한다.
Buen Camino!
나도 기계적으로 부엔까미노! 라고 받아치며, 동공이 반쯤 풀린 상태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영락없는 한국사람이었다.
빨간 바람막이에 검은 반바지, 얼굴은 벌겋다 못해 시커멓게 탄 경상도 말씨를 쓰는 남자.
말 많은 내가 약 일주일간 한국인을 만나지 못해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다 보니
내 고충을 알아줄 것만 같은 이 한국인이 꽤나 반가웠다.
나는 물었다
“한국분이세요?”
그는 대답한다.
"예."
"어디서 오셨어요?”
"베를린에서 왔어요. 그쪽은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경기도에서 왔어요. 한국 어디서 오셨어요? 경상도 이신 것 같은데.”
“아, 네 부산사람이에요. 그런데 전 한국계 독일인이에요.”
“네??!! (황당)”
외모도 말투도 패션도 누가 봐도 한국사람인데.. 한국계 독일인이 무슨 말인가.
내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머쓱하게 웃는다.
그가 말한다.
“장난이에요 ㅎㅎ 전 베를린에서 살아요.”
“와, 어제 막 한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유러피언이시군요~ 음, 베를린. 베를린에 사는 건 어때요? 저도 이번에 유럽에 살 수 있는 곳이 있나 찾아보고 싶어서 여행 기간을 좀 길게 잡고 왔거든요.”
그러자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말한다.
“베를린은 음.. 사실 처음에 베를린 왔을 때는 진짜 싫었어요. 이전에 프라하에서 1년 정도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일 때문에 베를린에 오게 됐는데 더럽고 시끄럽고... 그런데 살다 보니까 좋아지더라고요.”
“신기하고 재밌네요? 베를린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음.. 베를린에 산건 4년 정도?”
"어릴 때부터 산건 아니군요?"
"네,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왔죠. 한국에서의 수직적인 조직생활이 잘 안 맞더라고요."
이후 짧은 대화를 조금 더 이어나갔다.
첫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해맑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그의 차림새였다.
순례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20L짜리 배낭을 메고, 손에 스틱은커녕 낡은 비닐봉지 하나를 달랑달랑 들고 신나게 걷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 당일치기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말이다.
“짐을 동키(운송서비스) 보내신 거예요?”
“아니요. 이게 전분데. 하하"
“아니? 지금 메고 있는 그 20L 작은 가방 하나 들고 왔다고요? 거기에 뭐가 들어있어요?”
“있을 건 다 있어요. 뭐 옷이랑 침낭이랑 먹을 거랑 "
“와 놀랍네요. 저도 엄청 가볍게 들고 온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전 진짜 여기 오기로 마음먹고 두 달간 매일 줄이고 줄여서 온 거거든요.”
"전 아침에 그냥 챙겨 왔어요. 지금 걸어보니까 이것도 쓸데없이 많이 챙긴 거 같은데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그의 큰 몸집에 비해 20L 작은 배낭은 꼭 계란 프라이의 노른자 같았다.
그가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오늘 어디서부터 걸었어요?”
“저 비양프랑카요. 어디서부터 걸어오셨어요?”
“저는.... 벨로라도요.”
“(화들짝) 네???????!!!!!!? 벨로라도면 이미 지금 25킬로 정도 걸어온 거 아니에요? 아니 하루에 몇 킬로를 걸으시는 거예요??!”
(*보통 순례자들이 하루에 평균적으로 걷는 거리가 25km 정도 되고, 그를 만난 시간은 오전 11시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약간 머쓱하면서도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그제는 55킬로를 걸었어요.”
나는 또 물었다.
"그럼 생장에서 언제 출발하신 거예요?”
“아 저는 6월 2일이요. 그쪽은 며칠에 출발하셨어요?”
“네????? 오 마이갓 말이 안 된다. 진짜 빨리 걷고 계시네요. 일단 전 5월 30일에 출발했고요.
아... 잠시만! 그쪽이 그 사람이군요!
며칠 전에 들었어요. 어떤 미친 한국남자가 하루에 40-50km씩, 사람이 걸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걸어오고 있다고. 그 사람이 그쪽인 거잖아요? 실제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신기하네요.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무릎이라던가 발목이라던가.”
“예, 전혀요. 괜찮아요. 안 걷는 게 더 힘들어요"
“아마 가방이 가벼워서 저랑 그쪽 둘 다 좀 나을 거예요. 생장에서 출발하신 거 맞죠?"
나는 놀라서 우다다 말을 쏟아부었고, 그는 내가 보이는 반응이 재밌었는지 신이 나서 내게 말했다.
“예, 쌩장에서 출발했어요.
첫날 쌩장에 오후 2시에 도착해서 사무실에 순례자 여권 만들러 갔거든요.
언제 출발하냐고 나한테 물어봤는데 오늘 출발한다고 하니까 다음날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는 지금 가야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 순례자 사무실 아저씨가 내 짐을 보더니 그 정도 짐이면 오늘 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그때 출발했어요. 오후 2시에.
걷고 있는데 길에는 아무도 없고, 산 꼭대기에서는 너무 춥고 무서웠어요.
그리고 두 번째 마을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할 쯤에 부킹닷컴에서 숙소를 예약했는데, 거리를 잘못 보고 예약해서 마지막에 4km 더 걸어갔어요.
그 와중에 배고파서 밥을 조금 여유 있게 먹다 보니 해가 지더라고요. 그래서 급히 걷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깜깜해지는 거예요. 진짜 엄청 무서웠어요. 결국 숙소에는 11시에 도착했고, 너무 힘들고. 오늘이 마지막인가 싶었다니까요."
나는 그의 말이 너무 웃겨서 깔깔대고 웃었다.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그 큰 등치로 계속 무섭다고 말하는 게 기가 막혔다.
그가 혼자 신나게 떠들었던 게 머쓱했는지 내게 묻는다.
“까미노는 왜 왔어요?”
나는 대답했다.
“음. 사는 게 힘들어서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요. 몸을 좀 괴롭히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까 해서 일 좀 정리해 두고 왔어요. 그쪽은요?"
“저도 일 그만두고 왔어요.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고..”
“큰 결심 하셨네요. 사실 일을 그만두는 것도, 마음속에 그리던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기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특히 순례길은 최소 한 달은 잡아야 하니까”
"그렇죠."
그는 뭔가 계속 주춤거리는 듯했다.
가만 보니 느린 내 걸음걸이에 맞춰 걷느라 그러는 듯했다.
“바쁘시면 먼저 가보셔도 돼요.”
“아 바쁜 건 아인데.. 오늘 어디까지 걸어가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서 많이는 못 걸을 거 같아요. 어제도 힘들어서 적당히 걸었거든요.”
“아이~부르고스까지 가야죠~”
(*부르고스는 순례길에서 만나는 몇 안 되는 대도시로, 그 지점에서 25km 정도 남아있었다.)
“오늘 부르고스 가세요? 벨로라도에서 부르고스까지 족히 50km는 될 텐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ㅎㅎ 전 지금 15키로 정도 걸어왔는데, 오늘 날씨도 그렇고 좀 힘드네요.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던 그가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듯 몇 번을 살펴보더니 내게 말했다.
“저는 사실 며칠 전부터 함께 걷는 미국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하고 장난치느라 빨리 걷고 있었어요. 근데 이제 마을에 도착했으니, 친구들 좀 기다리다가 같이 뭐 좀 먹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부엔까미노!”
“먼저 걸어가고 계세요. 금방 따라잡을게요!"
그는 돌아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와 헤어지자마자 이상하게도 여운이 엄청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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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와서 무슨 장난을 친다는 거야? 웃기네
생긴 건 곰 같아서 표정은 엄청 애기같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랬나?
연락처라도 받을걸 그랬나?
근데 왜 금방 따라잡는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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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함과 슬픔이 자리했던 마음이 그의 대한 생각으로 꽉 찼다.
놀랍게도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눈을 뜨기도 힘든 날이었다.
나는 그가 오고 있나?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빠른 그 속도의 걸음이라면 금방 나타날 것 같았는데, 몇 개의 작은 마을을 지나도 그는 나타나질 않았다.
2시간 정도 더 걷다가 오후 1시경, 눈에 보이는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갓 짜낸 오렌지 주스 한 잔과 에스테야담 맥주 그란데 사이즈 한 잔을 시키고,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내가 잘 보이는, 아니 안볼래야 안 볼 수가 없는 자리에 떡하니 앉았다.
그러나 30분을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길은 하나라 분명 그가 먼저 나를 지나칠 일은 없을 텐데 의아했다.
혹시 내가 잠시 주문하러 간 사이, 혹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를 스쳐간 것이 아닐까 하는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2시까지만 기다려보고 아니면 마는 거지' 하며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일기를 썼다.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1시 5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래 2시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하던 찰나, 저 멀리서 그가 보였다.
1시 55분이었다.
세상에 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렇게 기쁨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있었다.
그는 3명의 친구들하고 같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까 전에 만났던 스위스 아저씨였다.
그 스위스 아저씨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뒤이어 나를 발견한 그 경상도 남자도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나쳤다.
그냥 나를 지나쳤다.
손만 흔들고 그냥 지나쳤다.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가, 나보고 따라잡을 테니 먼저 가있으라던 그가,
부르고스까지 같이 가자던 그가 (그래 엄연히 말하면 같이 걷자는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잠시 잠깐이라도 내 정신을 쏙 빼앗아갔던 그가
나를 보고 멈추지도 않고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쳤다!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영화처럼 그가 지나가자마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더 앉아있을 겨를도 없이 우비를 쓰고 다음 마을로 넘어갔다.
이제 슬슬 어디에 묵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을은 여기서부터 7km 거리에 있는 Villafria 혹은 15km 거리의 Brugos였다.
다리도 길고 걸음이 빠른 그와 그의 친구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문득 방향을 잃는 느낌이 들었다.
비를 맞으며 뚜벅뚜벅 걷는데 길이 아닌 차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있는 금발머리 여자가 그쪽은 차랑 같은 방향이니 위험하다며 자기 쪽으로 와서 안전하게 걸으라고 했다. 나는 그녀와 짧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Villa fria에서 사라졌다.
고민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영락없이 부르고스까지 걸어가야 한다.
남은 거리는 약 8km 정도,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