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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트라 Apr 12. 2024

까미노에서 배운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

Pain is inevitable,Suffering is optional


2023년 1월 2일 운전을 시작했다.
내 명의의 차. 정확히 말하면 내 명의 ‘대출’의 장기렌트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단 한번 운전대를 잡아본 적 없는 내차였다.

내 명의로 차를 렌트한 이유는
내가 그보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오래됐고, 나이가 많아서 보험료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에겐 학원운영을 위한 스타렉스가 있었지만, 전 시어머니는 신혼부부는 모름지기 승용차는 한 대는 있어야 한다며 내게 장기렌트카를 권했다. 차는 원래 그렇게 사는 게 이득이라 했다. 렌트비는 당신이 내줄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처음 딱 한차례뿐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전 남편은 그 차를 잘 타고 다녔으니 우리가 내는 게 당연했다.

다만 내가 차를 조금 알았더라면, 굳이 장기렌트를 했어야 하나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그 얘기를 전 남편에게 했을 때 그도 말했다. 차는 원래 그렇게 사는 게 이득이라고.

이혼을 하니 그 빚(차)은 고스란히 내게 왔고, 나는 기한이 남아있는 1년. 차를 두고만 볼 순 없으니, 그동안 무서워서 못했던 운전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3차례 교통사고로 인해 운전에 대한 큰 두려움이 있었다.)

때에 맞춰 운전면허 갱신 시점이 다가왔고, 2022년 12월 30일엔 가까스로 운전면허도 갱신했다.

운전에 대한 기초지식이라곤 전혀 없던 내가 운전 연수를 받았다. 친구에게 60대 인상 좋은 남자선생님을 소개받았다.

당장 운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용감해졌다. 그리고 주행 말고도 궁금한 게 너무 많아졌다. 신호 보는 법부터 차량 검사, 심지어 주유하는 방법까지.

내가 주유하는 법을 묻자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그런 건 집에 있는 아저씨(남편)한테 물어보시면 되죠. “

나는 신호가 걸렸을 때, 나는 전방을 주시하며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제가 사실 얼마 전 이혼을 했어요. 그래서 운전을 배우는 거거든요. 그간 운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서인지, 차에 대해 너무 모르고 물어볼 곳도 없어요. 죄송해요. 근데 제가 당장 운전은 해야 하니... 별거 아닌 거라도 알려주세요. 열심히 배울게요. 저 좀 부탁드려요.”

그러자 선생님은 당황해하며,
연수 기간 내내 무척 열정적으로 알려주셨다.
연수가 끝난 날 선생님은 조수석에서 내리며 단호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저... 운전을 상당히 잘해! 왜 그간 운전을 안 했나 싶을 정도여요. 그러니까 자신감 가지고 허고! 지금처럼 천천히 달리면 사고 안 나요~
앞으로 운전하다가 아주 급한 상황, 그러니까 뭐 물어볼 일이 있으면 전화하세요. 나도 바쁜 사람이니까 자주는 안되고 딱 3번까지만. 알았죠잉?“

그 말씀만으로도 마치 슈퍼패스를 받은 것마냥 든든해졌다. 이후 나는 선생님께 딱 한차례 전화를 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안 내리고 엑셀을 밟으니 차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서.

운전하는 삶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
는 믿거나말거나한 후문.



순례길에 오른 지 9일 만에 약 300km를 걸었다.


본래 내 계획은 아주 느긋하게 걷는 것이었다.

평균적으로 프랑스길을 걷는 데에는 32일에서 35일 사이, 하루 걷는 거리는 20~25km 정도 된다.


나는 그 길을 정말 천천히 음미하며 걷고 싶어서

대략 40일 정도로 계획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4일 차부터 완전히 어그러졌다.

처음 3일은 동행자들과 한껏 상기된 상태로 걸었고,

4일 차부터는 혼자 걷기 시작했는데,

하루 평균 35km 정도 걸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순례자들이 걷는 거리에서 무려 10-15km는 더 걷는 셈이었다.


한 여름 낮, 스페인의 태양은 무척 강렬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걷다가 마주하는 카페 테리아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또다시 걷는다.

그렇게 걷다 보면 점심 무렵, 목표한 마을에 도착하면

또 점심을 먹고,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씻은 뒤 자신의 시간을 갖곤 했다.


그런데 나는 체력이 좋은 탓인지  그 정도로 걸어선

한껏 각성이 되어 밤에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도미토리 형태의 알베르게에서는

편히 자는 게 쉽지가 않으니 차라리 완전히 방전되어 픽- 쓰러져 자고 싶은데 그것이 안되니 밤새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5일 차부터는 점심을 먹고 난 후, 주변 순례자들이 쉬기 시작할 때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야 말 그대로 밤에 기절하듯 쓰러져 잘 수 있었다.



까미노에서 만난 순례자들은 내게 종종 물었다.

도대체 왜 그리 많이 걷는 것이냐고.

나는 그때마다 ‘어떤 경쟁이나 기록을 위함은 전혀 아니고, 그저 밤에 잘 자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머지않아 ‘고통을 잊기 위해서’로 변했지만.




사실 오전엔 걷는 일은 그저 즐거웠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과 인사하며 걷는

그 생기 넘치는 시간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혼자 걷는 시간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길 위에서 나 자신과 싸워야 했다.

점심 이후, 순례길에는 순례자가 거의 없었다.

그때부터가 진짜 고행길이었다.



그 강렬한 태양 아래 배낭을 짊어지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걷다 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올라오고 다양한 감정에 이리저리 빠진다.


물론 누군가의 눈치를 볼 새도 없이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걷는 날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심각하게 한숨을 푹푹 쉬며 걸었고,

하루 한두 번은 꼭 엉엉 울며 눈물을 훔치고 털어내며 걸었다.

  

그것이 내가 까미노에서 기대했던 시간이었다.

가장 나의 밑바닥의 감정들을 마주하는 것.

힘들었지만 꼭 마주하고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생각들은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시기에 따라 만나고 헤어졌던 여러 인연들과의 관계.

전 남편을 포함한 지나간 연인들과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 마지막 나 자신과의 관계.


그 관계들을 떠올리며 찾아온 감정들은 다양했는데,

그중 압도적이었던 감정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치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이미 깊게 경험 중이었다.

한국에서 까미노를 준비하면서 매일 같이 걸을 때,

가장 먼저 건드려졌던 비교적 표면의 감정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기억까지,

내 부정적인 감정의 대부분 수치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많은 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일,

나를 본인들 입맛에 맞춰 철저하게 이용했던 이들,

부모로부터 부당하게 혼나고 압박당했던 오래된 기억,

가깝다고 믿었던 이들이 한 내 험담,

하다못해 얼마 전 받은 운전연수에서의 난감한 상황이라거나 중고거래하며 사기당한 경험까지.

별의별 사건과 관계들이 모두 수치심이라는 항목 안에 담겨있었다.



그 셀 수 없이 많은 수치심에 대한 기억은

이혼이라는 극한의 단절 경험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분류되고 가뿐하게 정리되었다.


그동안 내가 느껴온 수치심들은

내가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욕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이었고,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자 어느 정도는 편안하게 해결되었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떠올렸다.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아무리 내 마음을 알아주려 해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힘들었던 부분은

부정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가족관계였다.


특히나 가부장적이고 무책임했던 아버지의 언행을 떠올릴 때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질 만큼의 수치심과 분노가 올라오곤 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알아차릴 겨를조차 없이

부모의 인생과 정서가 내 마음에 여러 무늬들로 새겨진 것 같았다. 거기엔 수치심과 분노라는 못생긴 무늬도 있지만, 분명 사랑과 안정감이라는 예쁜 무늬도 있다. 나는 그 무늬를 따라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


혼인신고에서 이혼신고까지는 정확히 만 40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의 이혼 사유는 흔한 3대 이혼 사유라는 <외도, 폭력, 도박>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전남편은 경제관념이 없고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사람보다 순하고 여리고 또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결혼생활 내내 내게 수치심을 주는 말을 아주 조금도 한 적이 없었다. 되려 내가 아무리 날 선 말과 반응을 보여도 ‘그렇구나, 우리 지혜가 힘들구나.’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결혼 초반부터 닥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이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착한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할 리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말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행동보다 말이 앞섰다.



이제와 진짜 나의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 다시 정의 내려보자면, 그와 나는 결코 같이 살래야 살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와의 미래를 떠올리면 기대는커녕 숨이 가빠오고 우울했다.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같이 먹고 싶은 음식, 같이 보고 싶은 영화, 같이 듣고 싶은 음악, 같이 가고 싶은 여행.. 그 어느 것도 없었다.



그와 나는 비슷한 무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 무늬의 이름은 '아버지의 역할 부재'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하는 집의 무늬는 엇비슷한 것 같다. 아버지의 몫을 엄마가 떠안고 자식들과 살아간다. 그리고 엄마의 스트레스와 부담은 첫째에게 꽤 많이 전가되는 모양이다.

장녀인 나는 우리 엄마의 감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장남인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의 엄마와 그의 엄마는, 동전의 양면처럼 완전히 정반대 가치관과 경제관을 갖고 계셨다.


나의 엄마는 돈이 무섭다고 했고, 그의 엄마는 돈이 우습다고 했다.

나의 엄마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며 다 찢어진 옷을 여러 번 꿰매어 입는 사람이라면,

그의 엄마는 돈이라는 건 한방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니, 옷은 한 철입고 버리변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엄마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짠내나는 사람이라면,

그의 엄마는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기쁨을 호화롭게 (‘남들만큼’ 이라는 말을 쓰셨지만) 누리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통큰 사람에 가까웠다.



우리들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엄마들의 무늬를 고스란히 닮았고, 그와 나는 함께 있으면 그 무늬의 차이로 인해 매일매일 시들어갔다.


나는 엄마의 인생을 닮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그의 엄마의 인생을 동경했다. 그가 자신의 엄마의 재정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혼 사유를 묻는 이들에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내가 자주 들어주는 비유로

마지막 내 이혼사유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나는 그와 내가 처음엔 둘의 생김새가 비슷해서 '어? 너도 줄이 있는 물고기네. 나도 줄이 있는 물고기야. 우리 비슷한 무늬를 가진 물고기이니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겠지? 친하게 지내보자' 하며 가까워졌고 결혼까지 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바닷물고기였고, 그는 민물고기였던 거지. 같은 환경에서는 결코 함께 살 수 없는, 같이 있으면 누군가 하나는 말라죽어버리는 관계. “




하지만 남들에게 비유까지 들어가며 쉽게 설명했던 나의 이혼 사유. 까미노 위에서만큼은 나 자신에게 쉽사리 통과되지 못했다.


- 아니, 이런 이유로 이혼을 했다는 게 말이 되나?

- 진인사대천명이라는 결혼을 나는 얼마나 가볍게 한 걸까? 나는 얼마나 가볍고 경박한 인간인가?


혼자 길게 걷기 시작한 하루 이틀은 그런 가벼운 결정을 한 나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이혼뿐만 아니라 나는 인생에 중요한 순간들을 앞에 두고 종종 가벼운 결정을 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나는 엄청난 증오와 경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바로 올라온 감정, 다름 아닌 죄책감이었다.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여리고 순한 전 남편을 끝까지 돌보고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


특히나 이혼하던 그날에 대한 잔상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나의 죄책감은 극에 달했다.







이혼하는 과정은 예상하듯 썩 좋지 않았다.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바빴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고, 하지 않았어야 하는 말들을 내뱉었다.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에 바빴다.


처음에 그는 집이 팔리기 전까지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완강하게 밀어붙였다.

하루라도 그 법적인 관계를 끊어내고 싶었으니까.


나 혼자 집안의 가구와 짐을 처분하고 정리하고, 재산이랄 게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재산 분할을 요구했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그 시간과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때의 내가 쓴 일기장에는 그 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손바닥으로 막아보려는 노력조차 없이 속절없이 맞아버리는 날들, 온몸을 구석구석 관통하는 듯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구태여 끝자락까지 경험하고 지쳐 잠들어 버리는 날들. 정말 너무나도 추운 겨울이다.>


/


정말 그런 날들이었다.

그 시간과 상황을 그렇게 마주하지 않으면, 언젠가 탈이 날 것 같았다. 앞으로의 날들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싫고 힘들어도 뭐가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직면해야 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 마지막 법적 절차를 마무리하고자 그의 나는 법원에서 만났다.

숙려 기간을 마치고 만난 법원이라는 낯선 공간 안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할 수도, 어떤 표정을 지을 수도 없었다.


맨 처음 이혼서류를 제출하러 왔을 때엔 전남편은 잔뜩 뿔이 난 상태로 법원에 나타났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표정이 덤덤하고 편안해 보였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차분히 나의 가족과 반려견 시몽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짧게 답하곤 그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없었다. 내가 그 가족 구성원에서 빠짐으로써 그 집이 얼마나 전쟁터인지 알 것 같았으니까.


한참의 침묵이 지나가고 그는 또다시 말을 꺼냈다.

혹여나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온다면 미안하지만 받지 말아 달라며 내게 부탁했다.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신데, 자신이 이혼한다는 것을 알면 악화가 될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예뻐하셨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딸인 전 시어머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경제적 부담과 요구를 제발 모른 척해달라고 따로 불러 말씀하셨었다. 그녀의 허영으로 인해 이미 원가족과 가까운 교인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그녀가 우리의 관계를 망쳐선 안된다며, 그러면 나는 정밀 살 수가 없다며 시모의 경제적인 요구를 제발 모른 척해달라며 내게 미안하다고 울며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 뒤,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드디어 그와 내 차례가 왔고 (놀랍게도 법원엔 이혼하는 부부들이 앉을자리가 없을 만큼 넘쳐난다.)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판사님 앞에 나란히 앉았다.


이혼에 동의하느냐는 물음에 그의 목소리는 세차게 흔들렸다. 곧이어 내게 온 물음에 나는 건조하게 답했다.

이혼확정 서류가 주어졌고, 나는 내가 처리하겠다며 그 서류를 들었다.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그 짧은 시간에 고민을 했다.

무슨 표정과 말로 마지막을 정리해야 할까?


차 앞에 서서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눈을 마주 본 시간이 몇 달 만이던가.

모름지기 마지막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의 얼굴에도 내 얼굴에도 더 이상 분노나 원망이 남아있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내밀며 "잘 지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내 반응에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금세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고, 나를 안으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 시켜서 너무 미안해. 그리고 정말 고마웠어." 나를 안고 어린아이처럼 꺽꺽거리면서 울었다.


나는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만 애매했던 왼손으로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 그래, 너도 나랑 사느라 애썼다. 앞으로 씩씩하게 잘 살아."


돌아서서 차에 앉자마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지' 하며 엉엉 울었다.

어떤 미련도 어떤 그리움도 아니었다.



/


뜨거운 까미노를 걷는 오후 2-3시경이면

그날의 잔상이 너무나 강렬하게 떠올랐다.


이 마음의 짐을 어떻게 덜어내야 할까?

고민하다 보면 어김없이 걸어온 거리는 30km가 훌쩍 넘어있다. 그런 날엔 유독 발가락엔 물집이 크게 잡히고, 발톱에 피멍이 든다.


그 고통 때문에 내일이면 걸을 수 있을까 싶지만,

나을 새도 없이 바늘로 물집을 터트리고 피멍이 든 발톱엔 밴드를 붙인 후, 다음 날 해가 뜨면 어김없이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떴듯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고, 삶은 계속되니까.


그렇게 까미노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고통을 직면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자주 되새긴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마주해야 한다면 결코 피하지 않고 바라볼 것이다.

그것만이 답이니까.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라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말없이 수긍할 수 있는 일은 몽땅 그대로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되도록이면 그 모습이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켜) 소설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이야기의 일부로 쏟아붓기 위해 노력해왔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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