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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트라 Mar 26. 2024

우리 이러려고 순례길 온 거 아니잖아.

처음엔 사랑이란 게 참 쉽게 영원할 거라 믿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 빨아서

침대 프레임에 널어둔 옷부터 확인해 본다.

레깅스가 이렇게 마르지 않은 것을 보니

운동화는 말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찝찝하지만 마르지 않은 옷을 그냥 입었다.

여분의 옷이 하나씩 더 있지만,

이 마르지 않은 옷을 가방에 넣으면

가방은 더 무거워질 테니

그냥 입어서 체온으로 말릴 요량이다.


운동화는 답이 없어서 배낭에 걸고

하이킹용 샌들을 신었다.

그리고 어제저녁을 먹었던 식당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은 뒤, 바로 길을 나섰다.



Roncesvalles, Spain



길을 나서자마자 청량한 숲길이 이어졌다.

오늘부터는 완전한 스페인 국경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한참을 걷다가 어제 만났던 피부가 하얀 남자를 또 만났다.

그는 자신을 ‘쏘니’라고 소개했다.


쏘니는 자신의 흰 피부를 어떻게든 사수하려는 듯

챙이 넓은 선캡과 UV차단 팔토시,

목엔 손수건, 얼굴엔 마스크까지 완벽히 장착했다.

눈을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를 다 가리니 마치 닌자 같다.


그 와중에 웃기게도 왼 팔목엔

귀여운 인형을 고무줄로 달고 있었는데,

그 인형의 의미를 물으니

여자친구의 분신(?)이라고 대답한다.

그 과정이 자연스레 그려지며

참 귀엽고 풋풋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걸으니 허기도 지고,

내리쬐는 더위에 목도 말랐다.

쏜과 나는 한 Bar에 들러 자리를 잡고

시원한 맥주 한잔씩을 마신다.


그러던 중,

어제 힘겹게 산길을 내려가던 여자가 지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하며 몸은 좀 어떠냐고 물었다.

날이 많이 더우니 괜찮으면 목 좀 축이고 가라고 제안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내 옆자리에 앉는다.

그녀의 이름은 ‘이나’


나와 쏘니 그리고 이나.

우리 셋의 동행은 얼떨결에 맥주를 마시며 시작되었다.


 

우리의 첫 만남! 시원했던 맥주!


쏘니와 이나는 동갑이었고,

나보다 10살 가량 어린 20대 친구들이었다.


쏘니는 자신을 정석대로 살아온 사람이라 소개하며,

얼마 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근무지가 정해지기 전 급히 이곳에 왔다고 했다.

취미는 검도라고.


이나는 연기를 전공했고

졸업 후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이게 맞나?' 싶어 자신을 찾고자 이곳에 왔다고 했다.

온 김에 운명 같은 사랑도 만나는 기대도 한다고!


나는 평범한 30대 중반 여성으로

얼마 전 이혼을 했고, 후에 모든 일을 중단하고

이곳에 왔고 그냥 속 편할 때까지 걷고 싶다고 말했다.

유럽에 온 김에 살만한 곳을 찾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들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혼한 사람을

직접 만난 건 처음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또 이곳이니까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사람과 경험으로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렴 상관없다.



우리 셋은 약 3일간 꼭 붙어서 걷고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최악의 연애 상대, 인생 최대의 고비 등 미래의 꿈과 고민까지도.


직업과 나이, 환경들을 온데간데없이

사람 자체에 대한 호기심만 가득했다.

이런 인간관계를 가져본 게 언제더라 곱씹어봤지만, 너무 오래돼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어느 순간 말의 형태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청보리밭을 지나며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나 : 우리 그냥 다 같이 말을 놓는 건 어떨까?


쏘니 : 에이... 그래도 우리가 누나보다 훨씬 어린데, 말을 놓는 건 좀..


이나 : (쏜을 말리며) 야! 언니가 괜찮다잖아! 언니!! 그럼 우리 진짜 반모 해도 돼요?


나: 그럼~ 뭔가 지금 우리 사이에 존댓말이 의미가 있나 싶어서~ 난 안불편하거든. 그런데.... 반모..? 그게 뭐야...?


그러자 쏘니와 이나가 깔깔대고 웃는다.


쏘니: 누나 반말모드요 ㅎㅎ 아 맞다 반모 하기로 했지! 반말모드야~~


이나: 아이참 나이차이 안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반모를 모르는 거 보니 존댓말 써야겠네 어르신~


나: 아니야 나 이제 알아 반모! 반말모드! 입력했어!


Zubiri에서 이나와 쏘니



셋의 동행은 순수하게 즐겁고 재밌었다.

이나는 매우 외향적이고 유쾌한 성향으로 여러모로 나와 쿵짝이 잘 맞았고,

쏜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하는, 조금 뚝딱거리는 선비 같은 친구였다.


나의 복잡한 머릿속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샌가 잊게 되었고,

그들의 고민은 내게 와닿으면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이해관계없이 새로운 친구들의 존재가 그저 감사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

동행 3일 차,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함께 걷던 쏘니가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게 성큼성큼 앞서 걷는가 하면,

이나는 급 우울해져서 말을 아끼기도 한다.

그리곤 약속이나 한 듯 어느 지점에서

어김없이 서로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점심을 위해 작은 시내가 흐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네모난 테이블, 의자 하나는 비워두고 마주 앉는다.

나와 이나는 감자 또르띠야, 쏘니는 샌드위치.

그리고 시원한 맥주 세 잔을 주문했다.


쏘니가 맥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심각한 얼굴로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운을 뗀다.


"있잖아. 나는 문득 우리가 이렇게 같이 걷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누나랑 이나랑 같이 걷는 건 정말 재밌고 좋은데, 이러려고 온건 아니니까.."


뒤이어 이나가 말한다.

"나도 쏘니랑 같은 생각에 어제부터 마음이 복잡하더라고.

진지하게 내 인생을 고민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우리는 너무 즐겁고 들떠있으니까."


나는 가만히 진지하게 듣는다.

쏘니는 내 대답을 기다리듯 나를 바라보고,

이나는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내게 묻는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한다.


"당연히 공감해.

나 역시 까미노에 오면 내내 진지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이 길을 걸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앞에 있는 두 친구를 가리키며)

여기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또 서로에 대해서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있고!

게다가 우리 셋, 지금 좀 즐겁고 재밌지 않아?

난 이 또한 까미노의 일부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여행의 기본값은 예측할 수 없음 같아.

너희도 알겠지만, 여행의 모든 순간이

늘 내 기대처럼 또는 내 마음처럼 흘러가진 않잖아?


어쩌면 여행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

인생을 뒤바꿀 어마어마한 인연을 만나는 것,

번뜩이는 영감을 얻는 것.

그런 기대는... 망상 아닐까?


게다가 돌이켜보면

오히려 내 맘같지 않고 힘들었던 여행일수록

오랜 시간 회자되며 마음에도 깊게 남고

인생의 찐 교훈을 주기도 하잖아.


늘 내 계획 또는 기대대로 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 특히 여행에선 더더욱.



그래서 나 역시 현재 너희와 보내는 이 시간이

내 계획엔 전혀 없었던 그림이지만, 오히려 좋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알 것 같거든.

머지않아 우리도 다 헤어지게 될 거야.


이 길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고 살 수도 있겠지.

그러니 허락된 이 찰나의 순간을 불편해하지말고

같이 즐겁고 신나게 걸어보자!

어차피 헤어지게 될테니까!

나중에 더 신나게 놀걸, 더 잘해줄걸 후회하지 말고ㅎㅎ“



내 이야기를 들은 쏘니와 이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이다.


우리는 그날 까미노에서 만나는 첫 도시,

팜플로냐에 들어섰고 늦은 밤까지 신나게 맥주를 마시며 놀았다.


완전한 보름달이 떠오른 밤이었다.

그 달을 보며 알베르게로 돌아가는데

살짝 취기가 오른 이나가 내게 말한다.


“언니, 나 첫날 피레네 산맥 힘들게 넘어오는 거 봤잖아.  내가 무릎도 안 좋고 체중도 나가고, 하필이면 그날 몸 컨디션도 정말 안 좋았거든.

게다가 비는 주룩주룩 내리지.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어. 왠지 다음날 못 걸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더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어쩌지 고민하는데 사람들이 분주하게 나가더라고. 그래서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일단 딱 10km만 걷자!’ 하고 나왔거든.


그리고 꾸역꾸역 걷는데 백주대낮부터 맥주 마시는 언니랑 쏘니를 딱 만난 거야! 완전 내 스타일이었어!

지금 돌이켜보니 언니랑 쏘니랑 함께 걷는 것이 즐거워서 따라 걷다 보니까, 무릎 아픈 건 점점 사라지고 체력이 붙는 게 느껴져. 아마 언니랑 쏘니 아니었으면 이미 포기했을지도 몰라.


그리고 이제는 나 산티아고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완전 생겼어! 내가 그 힘든 상황에서! 그 험하디 험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잖아?

그러니까 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느리더라도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아! 완주뿐만 아니라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런 이나를 기특하게 보며 말한다.


“하하, 이나 너는 너를 너무 몰랐네.

난 처음 너 피레네에서 봤을 때 엄청 힘들어 보이는데 웃으면서 "먼저 가세요~ 저 천천히 갈게요" 하며 자기 페이스대로 걸어오는 널 보며 생각했어.

‘저 사람 자기 페이스를 잘 알고 있으니, 느리더라도 이 길 끝까지 걸을 수 있겠다’라고.

당연히 너는 산티아고까지 완주하지. 말해 뭐해? 그리고 네 말대로 너는 뭐든 다 할 수 있어!! 넌 뭐가 돼도 될 놈이니까!”


“맞아 언니 나는 진짜 될 놈 될이야!! 될 놈 될!!!!”


"될 놈 될? 뭐야 그건 또? 반모 2탄인 거지?"


"ㅋㅋ 맞아 될 놈은 된다라는 뜻이야~"


"그럼 그럼, 이나도 쏘니도 될 놈 될이지! 나도 될놈될이고! 우리 다 될놈될이지! "




우리는 다음날 휴식을 선택했다.

동생들은 4일간 자신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대폭 줄였고,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신나게 팜플로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했다.


저녁은 알베르게 키친에서 거하게 요리를 해 먹었다.

이나는 냄비밥을 지었고, 쏘니는 신라면을 끓였다.

나는 한국에서 딱 하나 가져간 카레여왕을 동생들을 위해 개시했다. 까르푸에서 산 돈가스까지 얹으니 환상적인 한 끼가 완성되었다.  


오래간만에 먹는 한국 음식에

모든 걱정과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 하다!

정말 맛있고 행복했던 저녁 식사였다!


쏘니는 다음에 꼭 함께 밥 해 먹자며

남은 500g의 쌀을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했다.

(까미노에서 자신의 배낭에 500g의 짐에 얹는다는 것은 아주 큰 배려이자 호의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이나는 무릎에 무리가 가서

얼마 가지 않아 만나는 마을에서 멈췄고,

뒤이어 쏘니도 발목 부상으로 그 다음 마을에서 멈췄다.


우리는 예상보다 더 빠른 시간 내에 뿔뿔이 흩어졌고,

안타깝게도 산티아고 완주하는 날까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까미노를 걸으며 종종 연락을 했다.

이나는 내게 우리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쉽다며

셋이 걷던 그때가 그립다고 말하곤 했고


쏘니는 그 쌀을 이고 한참을 걷다가,

도무지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 쌀로 다른 일행들과 밥을 해 먹었다며 미안해했다.


지금도 나는 자주 이나와 쏘니를 포함한

까미노에서 만난 친구들을 종종 떠올린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애틋하고 기분이 좋다.

쏘니는 첫 사회생활을 씩씩하게 잘하고 있을까?

이나에겐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왔을까?



좋은 인연이란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로에게 기대도 실망도 없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사이.


그들을 떠올릴 때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믿으며,

마음 깊이 그들의 행복과 건강을 바라게 된다.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란 것엔 이견이 없다.


그러니 내게 오는 인연들을

존재 자체로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살고 싶다.

계산 없이, 두려움 없이,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고 흘려보내는 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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