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담긴 노자의자연 2

‘흔들리며 열리는 장소‘

by 빵굽는 건축가


평소보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조용한 발걸음으로 뒷마당에 나가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선 새벽 공기를 마주합니다. 잠시 비가 왔는지, 젖은 흙이 밟히고, 지붕 물홈통에서 똑똑 소리가 일정하게 내려옵니다.
이런 날의 공기는 깊게 들이켜지 않을 수 없이 좋습니다.

노자의 이야기가 흐르는 건축 공간이 있다면 어떤 곳이 될까 머릿속으로 잠시 그려봅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차를 마시는 중에 펜을 열어 그의 공간을 그려봅니다. 생각 속에 있는 이미지를 종이 위에 올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노자 선생의 이야기를 느낄 만한 장소가 확연히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만 앞선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다시 책을 펼쳐 밑줄 친 구절을 곰곰이 몇 번 더 읽어봅니다.

<유가식 전통은 항상 구분과 배제 그리고 억압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제한적으로 운용되고, 그 제한적 운용이 분쟁의 씨앗이 된다. 그러므로 노자는 배제된 것이 없는 전체 자연의 모습을 모델로 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_도덕경 중에서>


‘자연의 모습을 모델‘로 하는 건축은 어떤 것일까요?
숲과 나무를 예로 들자면 숲에는 밀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없고, 숲에 들어오면 나는 숲의 일부가 되고, 어쩌면 나는 나무 일지도 모릅니다.

몇 해 전부터 지역에 소재한 기존 학교들의 공간 재구성을 맡고 있습니다. 사각형의 벽돌 벽안에 아이들과 선생님들, 배움의 공동체 구성원을 위한 소통과 민주적인 장소를 채워주는 일이 저의 역할입니다. 정해진 박스 안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는 일은, 비워내는 일보다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비움과 채움은 다르지 않은 과정인데도 말이죠. 비어있기 때문에 숲과 나무가 채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요?

학교일을 할 때 아쉬운 것은 아무리 해도 사각 박스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럴 때는 ‘흔들기‘가 필요합니다. 존재를 흔들어주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애매하게 엮어 있는 것들이 떨어져 나갈 수 있어요. 흔들림이 건축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건축가가 사용하면 그 뜻과 의도가 종종 모호한 표현으로 들릴 때가 있어요.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죠. 모른다고 하기에는 알겠고, 안다고 하기에는 정확히 잡히지 않는 머뭇거리는 몸짓과 공허한 눈 빛들이 그 증거입니다.

˝선생님 우리 교실 벽 중에 일부를 화단과 연결하면 어떨까요? 벽 대신 유리문을 설치하고, 교실에 ‘정원이 들어오는 일종의 장치‘를 만들어보죠.˝ 외부와 단절되어 있던 밋밋한 장소에 진동을 주기 위한 수작을 걸어봅니다. 수 십 년간 서 있던 벽 하나를 헐어내면, 어딘가와 연결되는 원리가 작동하게 됩니다. 흔들림을 위한 떨림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유리문은 막히되, 막히지 않은 연결 통로이고 ‘사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 사이로 빛이 들고 소리가 들고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죠. 그리고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자연과 연결되는 관계입니다. 막힌 장소에 숨통이 좀 생기는 것이기도 하고요.

한 번 더 흔들기를 합니다.
˝선생님, 교실 앞에 있는, 보기만 했던 화단들 말이죠. 그것을 아이들이 만지며 느낄 수 있는 작은 정원으로 만들어보죠˝

선생님들은 저의 흔들기에 한 표를 던집니다.
˝건축가님 이번에는 또 어떤 장소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해봅시다.˝

노자의 글을 건축에 빗대어 보자면, 네모진 장소는 통제와 감시, 효율적 운영은 가능하지만, 자연 전체의 모습과는 다른 장소임이 틀림없습니다.


20210813_085606.jpg 40년 넘게 막혀있던 벽돌벽을 떼어내고 그자리에 잠자리 날개 모양의 아이들의 아지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흔들기를 심하게 한 것인지는 몇개월 더 지나보면 알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