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2일
시골 분교에 다니고 있는 딸아이는 시내에 나가는 일을 즐거워합니다.
”아빠 나 문구점에 가야 하는데 언제 갈 수 있어?” 우리 가족이 시내에 살고 있다면 학교 앞에 문구점이 있을 텐데, 딸아이의 분교 앞에는 문구점도,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는 분식집도 없습니다. 학교 앞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긴 개울이 있고, 시간의 길이만큼 크게 자란 은행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필요한 문구류는 학교에서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문구점에 다녀올 일이 없었습니다. 최근에서야 딸아이와 함께 시내에 있는 문구점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다녀오고 있습니다. 주로 사는 품목은 제가 학교에 다닐 때와는 다른 품목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스티커, 다이어리 꾸미는 재료, 모형 만들 때 사용하는 우드락이나 하드보드지 같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수업과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입니다. 옛날 일만 생각하자면 학교 앞에 문방구가 있었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늘 인사를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문구점에 함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문구점은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니고 서울입니다. 대학로에 가야만 다이어리를 꾸미는데 쓸 재료들이 있다고, 그곳에 가자고 합니다.
“뭐 서울에? 대학로까지? 그런데 거기에 있는 문구점은 어떻게 알았니?” 딸아이는 “유튜브에 보면, 거기서 살 수 있다고 나와 있어”, 저는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지만 아이에게 거절당했습니다.
아내는 이왕 올라가는 거 미술 전시회도 관람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자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야 일 때문에 자주 올라가는 편이지만 딸아이 입장에서, 서울은 색다른 장소로 보이는 게 틀림없습니다.
며칠 전에 딸아이는 “학교에서 삼각자를 가져오라고 하네”
“그래 집에 삼각자가 하나 있어, 그걸 가져가면 되겠다.”
“아빠 두 개가 필요하니까 회사에서 한 개 가져다 줄래?”
제가 하는 일이 건축일이다 보니 사무실에는 다양한 종류의 자가 있습니다. 디자인할 때 쓰는 각도자, 다양한 크기의 원을 그릴 수 있는 빵빵이, 몇 개의 각도가 있는 삼각자, 도면에서 치수를 그릴 때 사용하는 삼각 스케일 , 현장에 나갈 때 사용하는 줄자, 수십 미터의 먼 거리를 재야 할 때 사용하는 디지털 측정기, 모형을 만들 때 쓰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자까지 아이가 생각할 때 아빠 사무실에는 없는 게 없는 곳 일 것 같습니다.
딸아이는 “아빠 내가 자를 하나 만들어 갈게 아빠가 가져다준 각도자는 너무 좋은 것 같아서 내가 만들어 가져 가는 게 좋겠어” 두껍고 빨간 하드보드지로 삼각형 자를 만들더니 이만하면 되겠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삼각자로 수업은 했니?”
“아빠 애들이 삼각자를 가져오지 않았어. 나랑 지연이랑 하진이만 가져오고 나머지 애들은 그냥 왔어. 선생님이 삼각자 수업은 다음에 하기로 했어”
며칠 후에 딸아이는 같은 이야기를 하네요.
“아빠 오늘도 삼각자 수업을 못했어, 내 생각에 아이들이 삼각자를 안 가져온 것 같아!”
학교 앞에 문구점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회사일과 농사일로 바쁜 엄마 아빠가 시내에 있는 문구점에 다녀오는 것도 큰 일 중에 하나 일 것 같습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옮기자면
“아마 새로 오신 신임 선생님이셔서 상황 파악이 안 되셨을 것 같아. 선생님이 금방 적응하실 거야” 대학을 막 졸업하고 지난 9월에 발령을 받은 신임 여선생님이 딸아이의 담임으로 오셨습니다. 작은 학교에는 교과 담당 선생님이 4분 계시고, 학교 시설을 관리해주시는 옛날 말로는 소사 선생님, 유치원 담당 선생님, 방과 후 선생님까지 모두 7분이 계십니다.
“아빠가 선생님한테 이야기 좀 해줄래?, 애들이 삼각자 안 가져오면 수업을 못하잖아” 딸아이는 학부모 회장을 맡고 있는 저에게 종종 이런 청탁 비슷한 것을 부탁합니다. 저는 “그건 학부모가 시시콜콜 이야기할 거리는 아닌 것 같아. 네가 선생님께 말씀드려보면 어때? 삼각자를 학교에서 준비해 달라고 해봐”
아내도 저도, 선생님이 시골 분위기를 아실 때 까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한 번은 학교에 다녀오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학교라고 해봐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기 때문에 잠시 다녀오면 됩니다.
그렇다고 삼각자 때문에 왔다고 할 수는 없겠고, 겸사겸사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삼각자 수업을 유도하다 보면 틈이 좀 보일 것 같기는 합니다.
”아 맞아요 선생님. 지원이가 삼각자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가져다주었는데 수업은 어떠셨어요?” 요렇게 틈이 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삼각자를 가져오지 않아서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하시면, 그때 슬쩍 시골 동네 상황을 귀띔해 드려야겠습니다. 잘 되어야 할 텐데 벌써부터 웃음이 납니다. <츠바키 문구점>이란 소설을 읽다가 삼각자 이야기까지 연결이 되는군요.
제 기억 속에 있는 문방구는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건너편 좌측에 있는 문방구였어요. 빨간 벽돌 2층 건물의 1층에는 파란 배경에 흰색 글자로 ‘제일 문방구’라고 쓰여 있었고, 주인아주머니는 눈이 크고 살이 통통하시고 웃음이 많은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 벌써 40년 전이네요. 없는 게 없는 만물상 같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딸아이 덕분에 아주 오래전 기억을 살려봅니다.
<나는 새삼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위쪽은 유리인 오래된 쌍 바라지 문에는 왼쪽에 ‘츠바키’(동백나무), 오른쪽에 ’ 문구점’이라고 쓰여있다. 이름 그대로 집을 지키듯이 입구에 커다란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_ 오가와 이토 ‘츠바키 문구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