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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Nov 16. 2021

정이네 종이 상자

2019년 11월 19일

겨울의 초입에 웬 비가 이리도 많이 오는 것일까요? 지리산 제철음식에 다녀오는 동안 줄곧 비가 오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제철음식 나들이는 단풍철 귀경길과 겹쳐서 평소보다 오랜 시간 차 안에서, 이틀 사이에 있었던 같은 경험, 다른 느낌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네요. 


이번 여행에서는 몇 년 만에 '정이네'를 만났습니다. 지리산 실상사 주변에 지인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는데, 딸아이와 산책 중에 '정이네'를 만날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아내가 '제철 밥상'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부녀는 '산내'마을 안 길을 다니며,  

"딸 저쪽 길로 갈까?"

"아냐 아빠 난 이쪽 길이 가고 싶은데"


어린이가 손을 잡아끌며 가자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이에요 법우님" 저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쳐다보니, 20여 미터 떨어진 닭장 앞에서 농부 한 분이 저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닭장에 왕겨를 깔아주는 중인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정이네 아빠였습니다. 

지리산 근처로 가서 농사를 짓는 다고 몇 해 전에 전해 들었는데, 정이네 집이 실상사 건너 마을이었습니다. 


"반가워요 차 한잔 하고 가요" 

"좋죠, 따뜻한 차 한잔 주세요. 자기네 닭이에요?"

"네 여기가 우리 밭이고 앞집이 우리 집이에요"

몇 해전까지 닭을 기르던 우리 가족도, 왕겨를 깔아주는 모습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 왕겨를 구하기 위해 정미소에도 다녀오고, 그랬는데 정이네는 농사를 지으니 왕겨 걱정은 없어 보입니다. 

정이네 아빠, 엄마와는 불교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입니다. 법으로 맺어진 친구 '법우(法友)'라고 부르다 보니 나이에 상관없이 부르는 호칭이 법우입니다. 정이 엄마는 오랜만에 보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더니 "아 알겠다 오랜만이에요 반갑다. 들어와요. 딸인가 봐요. 많이 컸다. 들어가요" 뭐라 대꾸할 사이도 없이 정이네 엄마를 따라 시골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양배추 농사 지은 거죠?"

"맞아요 우리가 지은 거예요"

"갈 때 몇 포기 사가야겠다."

"무슨 소리예요, 사가기는요. 이런 건 그냥 나누면 되는 거예요. 사가다니 그런 소리 마세요. 부끄럽잖아요"


마실 차를 준비하던 정이네 엄마는 양배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법우님 안 그래도 어제 실상사 느티나무 생협 매장에서 땅콩이랑 고사리 샀어요. 땅콩 봉투에 '정이네'라고 스티커가 붙어 있어서 긴가민가 했는데 자기네 집이었네요. 이렇게 가깝게 살고 있는 줄 몰랐아요. 한 달에 한 번 내려와서 어린이랑 느티나무 매장에서 차도 마시고 책도 보고 그래요. 엄마는 제철음식 만들고요. 고사리랑 땅콩에 정이네라고 쓰여 있어서 혹시나 하고 봉투째 다 샀어요"


정이 아빠는 "안 그래도 연락이 왔어요. 땅콩이랑 고사리가 다 팔려서 더 가져다 놓아야 한다고 느티나무 매장과 통화했어요. 가져간 게 자기네 였구나?" 하고 씩 웃습니다. 옛날이랑 똑같은 표정으로요.


정이 엄마는 쑥차를 내왔습니다. 

"이거 올해 처음 내린 쑥차인데 맛있어요" 


정이가 6학년이고 둘째 진이는 4학년으로 딸아이와 나이가 같습니다. 딸아이와 동갑내기 진이는 금세 친해지더니 자기들끼리 놀러 나갔습니다. 두 사람이 10년 사이, 농부가 되어온 시간들이 쑥차를 덖은 향으로 느껴집니다. 직접 담근 딸기잼도 맛있어 보입니다. 농사짓는 일과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땅은 어떻게 구했는지, 몇 잔의 쑥차를 더 마시는 동안 들려주었습니다. 


정이네 부부는 조용한 분들입니다. 1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랑 지금이랑 목소리 톤도 그렇고, 얼굴을 들어 이야기하는 버릇,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눈빛이 그대로입니다. 사는 집과 장소, 하는 일은 바뀌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과 소리가 그대로라서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문전옥답(門前沃畓)이라고 하죠. 바로 집 앞에서 땅을 일구고 있는 정이 엄마는 볕도 잘 들고, 차를 대기도 편해서 시세보다 조금 더 주기는 했지만 집도 편하고 농사를 짓기에는 그만이라고 합니다. 전업농이 아닌 텃밭지기인 저로서는 100%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건축가의 눈 맵시로 보더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집의 구조와 마당, 밭으로 이동하는 길이 보이더군요.  


시세보다 비싸게 샀다는 것을 추측하자면, 아마도 그전 주인은 세월이 갈수록 편리한 이 집의 가치를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양배추, 딸기잼, 양파즙, 단감을 싸주는 정이 엄마는 오늘은 걸어와서 차가 없으니 이만큼만 가져가라고 합니다. 고마운 인연들입니다. 지난 10년간 땅에서 자기 자리를 잘 가꾼 부부의 모습이 정겨운 계절입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딸은 양배추를 두 손으로 안고, 저는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내려왔습니다. 


"아빠가 청년 때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이야. 그런데 옛날 그대로다. 목소리도 웃음도 그대로야. 진이랑은 이야기 많이 나누었니?"

"응 산내초등학교 다닌데, 우리 학교보다 아이들이 더 많데"

"너도 산내 초등학교 다닐래?"

"아빠 난 우리 학교 친구들이 있어"


자기 자리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안겨준 든든한 보급품을 안고, 들고 산을 내려옵니다. 


종이박스에 마음이 가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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