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을 위한 건축기록

스케일 없는 큼직한 연필그림

by 빵굽는 건축가


보통의 집이 남향을 바라보는데 비해 서향으로 차분하게 자리한 황선생 댁 지붕 공사가 한창입니다. 현장을 이끌고 있는 김 소장은 비계발판에 올라, 2층 지붕에서 내려오는 처마 끝 아래에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는 처마를 향해 쳐들고 있습니다. 왼손은 안전 난간을 잡고 2B 연필을 든 오른손으로 지붕 끝선에 짙은 v 표시를 합니다. 표시된 선에 맞추어 거제조선소 출신의 다부진 몸짓을 한 영팀장은 다음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고,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일 수도 있는 처마의 끝선이 마무리되는 정도에 따라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다 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단정하고 정갈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건축가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장소에 마음을 두고, 안 두고에 따라 집의 꼴도 결정 납니다. 도면에서는 그림이지만 1:1로 만들어지는 실물에서는 눈으로 직접 보고 분위기를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처마 끝선이 정리된 자리를 따라 벽돌 공사도 지붕의 금속선과 평행하게 이어져 잔선이 없는 집이 될 것입니다. 처마선을 마무리하고 내려온 김 소장은 제 앞에 앉더니 연필을 꺼내 들고 이면지를 펼쳐 그림을 그립니다. 제 두 눈도 김 소장의 연필 쥔 손을 따라가며 고개는 살짝 기울여 스케치를 지켜봅니다. 이면지 위에 슥슥 그려내는 연필선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소통의 수단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는 감정과 기분만 알아챌 뿐 속뜻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들은 손그림을 더 선호합니다. 사진도 있기는 하지만 기억에 머물고 손그림처럼 현장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는 어렵습니다.

김 소장은 한 선을 긋고, 교차해서 다른 선을 잇고, 또 몇 개의 선에 원과 꼭짓점을 그립니다. 그려진 연필선에 저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올려, “여기서 반대편 이지점까지 처마가 벽돌과 평행하게 가도록 기준점이 필요했던 거군요?”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면 과정과 이유도 명확해집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축사무실을 지을 때도 그랬고, 의뢰받은 건축주들의 건물을 지을 때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때로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 짙은 선을 잇기도 하고, 마감을 하기 전 바탕 벽에 연필그림을 그리곤 합니다. 세월이 흘러 집을 수선하기 위해 벽지를 떼어내거나 페인트를 벗겨내다가 손으로 그린 스케일 없는 큼직한 연필그림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저라면 사진으로 남기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은 이야기해줄 것 같습니다. 현장 사람들의 손짓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겠지요? 현장에서 그려지는 밑그림은 혼자 알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소통하기 위해 표현되는 우리들의 언어입니다.

스위스의 건축가 ‘피터 줌 토르’는 인터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말로 하려고 하지 말아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건축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저도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이 글을 읽는 문장가들 중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저의 직업이 건축가라는 특수성은 이해해 줄 것 같습니다.

안성에 지어지고 있는 황선생 댁 지붕 처마선 안쪽이 깔끔하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김 소장님 도면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잘 정리해 주었네”라는 저의 말에 연필을 쥐었던 손을 내려놓고,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 좋은지 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곤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던 몇 해전 건물들의 사진도 보여줍니다. 경사가 심한 창과 창틀의 관계를 고민했던 기록, 미술 갤러리의 금속 출입문과 외벽 창이 만나고 이어지는 디테일을 정리하던 흔적들, 그때의 사람들과 그날의 분위기도 빼놓지 않고 들려줍니다. 사실은 같은 사진과 같은 이야기를 해마다 듣고 있지만 그래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늘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는 황선생 님처럼 집 꼴도 차분한 모양을 갖추어갑니다. 이번 주말에는 로즈 브론즈로 도색된 금속 창틀이 들어오고, 다음 주에 벽돌팀이 합류해 외벽공사가 이어지면, 오늘 수고한 여러 사람들의 흔적도 분명하게 새겨질 것입니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들을 황선생 님에게 전달하는 것은 제 몫이 되겠지요. 마음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도 집주인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건축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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