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에 한의사 한분이 사무실에 찾아오셨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한의원으로 변경하고 싶은데, 당장 할 일은 아니지만 먼저 상의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건축가로 살게 되면 다른 이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스캔하듯이 살펴보는 일을 마주하게 됩니다. 장소에 대한 기억을 듣다 보면 상대의 마음도 살피는 처지가 되고, 대화중에 “맞아요, 그랬었죠, 좋은 제안이세요” 라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저의 기억들까지 나누게 됩니다. 한해를 기준으로 10여 채 남짓한 건축물을 안내하고 있으니 적어도 열명이 넘는 사람들의 기억을 공유하고, 기록하는 셈이죠.
중국의 지리학자 ‘이푸투안(Yi-Fu Tuan)’은 정의합니다. “기억이 더해지고, 경험이 묻어난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면 그곳은 장소가 된다”
어제는 상도동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이른 봄부터 시작하게 될 리모델링을 위해 김 소장과 이 소장 그리고 제가 함께 동행을 합니다.
오래된 건물들이 사라지고 늘어난 건폐율과 용적률에 맞춘 새 건물을 짓는 요즘 세상에 “부모님께 물려받은 집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한의원을 운영할 거예요”라는 건축주에게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모습을 보았다고 할까요? 1년 전에 찾아오셨을 때 “오빠와 제가 상속을 받았어요. 다른 곳에서 개원하는 것보다 부모님이 지으시고 학창 시절을 가족과 지낸 집에서 의원을 시작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신축으로 용적률을 높이고, 임대료를 받는 방법도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건축주가 먼저 리모델링은 어떤지 물어오셨습니다. 지난 1년간 안부를 주고받으며, 전화로 의견을 나누었는데 새봄에는 개원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효율과 세련됨을 우선하는 시대에 저를 포함한 우리 조합의 건축가들은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다듬는 일을 즐겨합니다.
길이를 재는 디지털 측정기와 2B 연필, A3도판을 놓고 집의 크기와 모양을 그려 넣습니다. 초년생 시절에 배운 실측은 실무에 종사하는 내내 쓸모가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오래된 건물을 실측할 때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어떻게 그려나가면 오차가 적은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이나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은 사진을 찍어 형태와 크기를 가늠해 낼 수 있습니다. 실측을 하는 동안은 옛 건축가들과 나란히 걷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30년 전 언덕 위에 지어지는 주택을 위해, 땅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징들, 예로 들자면 땅의 기울기, 이웃집과의 관계, 해가 들고 나는 자리, 언덕 아래에서 집을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 같은 것들까지 이 집을 디자인하고 지은 건축가들의 눈높이를 유추하게 됩니다. 미국의 동화작가 ‘버지니아 리버튼’의<작은집 이야기>에서 오래된 시골 언덕이 도시로 변하는 과정을 그려낸 작은집 이야기처럼 작지 않았을 이 집도 지금은 주변에 비해 몸집이 작아져 보입니다. 아직까지는 동네 세탁소와, 호프집이 남아 있어, 처음 온 장소지만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검붉고 질팍한 질감의 벽돌집은 오랜 시간 동안 서 있음에도 균열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전 조적공들의 손맛과 정성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까요? 금속 틀에 나무를 덧대어 만든 양개문 옆에 벽돌 기둥이 서 있고, 그 옆으로는 외짝 문이 도로와 집의 경계를 담장 벽돌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스페니쉬 형태의 붉은 기와는 오래되어 금이 가고 집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더는 막아내지 못했는지 집안 곳곳에 쥐 오줌이 베인 것처럼 물자욱이 남아 있습니다. 세 개의 서로 다른 지붕 높이는 단조로울 수 있는 언덕에 변화를 주고, 향나무, 벚나무, 모과나무도 세월의 길이만큼 자라 지붕 높이까지 따라 올라온 것을 보면 시간과 함께 한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새집을 짓는 시대에 부모님께 물려받은 집을 한의원으로 쓰고 싶다는 의지에 기여해야겠습니다. 왜냐고요? 선배 건축가들과 시멘트를 바르던 미장 어르신, 타일공, 벽돌을 한 장씩 쌓던 조적공들, 붉은 라왕 널을 가지런하게 끼워 벽과 천정을 만든 목수들의 눈과 손, 발걸음, 숨소리를 이 집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 소장은 구조형식과 지붕 상태, 도로와 마당의 높이, 창들을 살펴봅니다. “잘 지었네, 예전 선배들이 정성이 있다니까. 아마도 벽돌을 쌓을 때 한 장당 얼마 이렇게 했을 거예요, 벽돌에 금이 간 게 얼마 없이 깔끔해요. 이런 벽돌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옆에서 묵묵히 실측을 하는 이 소장은 참나무 결이 살아 있는 원목으로 짠 주방 가구, 식탁의 위치, 꼼꼼히 구성된 벽장의 수납과 모양이 다른 나무문들을 종이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나무문과 주방가구들이 좋아요. 살려낼 수 있도록 해봐야겠어요” 동서로 6층 건물이 서 있는 이곳에 옛날 2층 집 한의원이 생깁니다. 남쪽에 도로를 두고 북쪽으로 깊이 들어온, 빛이 잘 드는 한의원은 찾는 이들에게 예전의 기억도 함께 들려줄 것 같습니다.
향나무와 단풍나무가 자기들도 집의 일부라고 하는 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깊이감 있는 정원도 실측하는 종이에 담아내었습니다. 정원사님과 상의할 일이 생겼으니 다음번에는 정원사님도 같이 동행을 하도록 일정을 잡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