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과 스타일

한 템포 쉬어 가는 여유

by 빵굽는 건축가

(2020년 1월 25일)


고양 현장은 김포 현장보다 한 달 늦게 시작해서 세동의 건물이 나란하게 벽과 바닥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날씨 핑계를 대고 쉬지 않고 힘껏 밀어붙여 성과를 내고 보니 그럴까요? 현장소장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 낀 여유가 보입니다. 설 명절 전에 하나라도 더 많이 진도를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가 가득하지만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한 템포 쉬어가는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현장에 왔는데 같이 점심하실래요?” 느닷없는 점심 제안에

“소장님 일찍 연락을 좀 주시지. 얼굴 보고 밥 같이 먹고 싶은데 설 전이라 너무 바쁘네요” 차례대로 세분의 건축주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3호 집 바람개비만 “네 지금 바로 달려갑니다”하고는 반가운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밥 한 끼가 뭐 대수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밥 먹으면서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에 정이 쌓이다 보면 괜한 오해도 없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일이라 특별히 시간을 잡지 않은 ‘번개모임’을 제안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들이 협동조합 건축가들을 너무 보고 싶어 하는데 다음번에는 주말에 오세요” 어린 친구들이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에 기분이 좋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이후로 못 본 지도 두 달이 되어가고 있네요. 집을 짓는 일은 정말 관계를 맺어가는 일이다 싶습니다.

“소장님 우리 큰 아이가 건축을 하고 싶어 해요, 저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 생각이 들고요, 대학을 꼭 가야 하나요?” 밥을 먹다 말고 난데없이 던지는 바람개비의 질문에 현장소장은 특유의 곁눈질로 저를 보며 그냥 웃기만 합니다. 저에게 대답을 하라는 뜻이겠죠.

“대학을 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안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라는 동문서답 같은 저의 이야기에 다들 피식 웃고 황태구이와 낙지볶음을 다 먹고 나왔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현장 소장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3호 포비가 남몰래 집짓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이 재밌어요. 왠지 제가 더 부끄럽고 잘 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엊그제 바람개비한테 부린 심술이 더 창피하고 부끄럽게 느껴지네요...^^

아무튼 더욱 힘내고 잘 지어야겠습니다..^^


‘밥해주는 건축주’ 리스트에 올라간 포비님이 집 짓는 과정을 글로 쓰고 있다는 소식에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글이 편하고 차근차근하게 가볍게 읽히고 그중에 정말 제 마음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더군요. 그 글 중에 일부를 옮겨볼까 해요. 실례가 되지 않을 만큼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소장님이 현장을 보러 오셨다가 전화하신 것이다. 못 뵌 지 한참 되어 버선발로 뛰어 나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난 너무 멀리 있었다. 난 사람을 쉽게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건축팀을 만났을 때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소장님이 입고 있었던 초록색 바지가 마음에 들었고, 진심이 느껴졌다. 말도 잘 통해서 대화가 즐거웠다. (.....) 우리 집을 지어준 건축가들은 우리에게 ‘백년손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살면서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 , 비록 우리가 비용을 내지만 그것이 내 마음의 고마움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나의 마음도 이미 사무적이고 의례적인 관계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지어진 집에서 잘 살고, 우리 집에 오실 때 따뜻한 저녁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마침 설 명절 전에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되었다.”


제가 좋아하는 초록색 바지가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진한 초록색 바지에 별난 사람을 다 보겠다는 표현도 있을 텐데 말이죠. 거기다 ‘백년손님’이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쏙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밥해주는 건축주’ 포비님의 표현처럼 저 역시 성사동 식구들은 긴 인연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서로 ‘통’하고 있었네요.


pimg_7184471112427889.jpg 개인적으로 저는 이때가 참 좋습니다. 벽체를 세우기 위해 창틀을 만들고 지붕의 각을 잡으면 하늘이 열리고사람으로 치자면 눈썹과 머리 스타일이 생기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짓게 되면 집이 전부 다인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두고 우기고, 고집 피우고, 오해하고, 싸우는 일이 많은데 돌아보면 집을 짓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지어지는 것이고, 결국 남는 것은 집 짓는 기간 동안 만난 ‘사람’(마음, 바람, 웃음)밖에 없음을 경험해왔습니다. 제 마음의 건축주들을 꼽아 보자면 숫자가 제법 되는데 성사동 식구들도 그렇게 되어가니 고맙기만 합니다. 유명 브랜드인 '샤넬'을 설립한 가브리엘 코코 샤넬은 1957년 라이프(LIFE)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유행은 퇴색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우리들은 지금 어떤 스타일을 남기고 있을까요?


새해에 새집에서 소란스럽고 수다스럽게 서로를 아끼며 살아갈 성사동 식구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성사동 식구들의 수다에 제 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남은 기간 동안 입심을 좀 더 길러야겠습니다. 한 번 모이면 아이들이 다섯에 동네 친구들이 네다섯, 어른들이 여섯 명, 모두 열대여섯 명은 되니 제 소리가 가려질 때가 생길 수 있거든요. 그나저나 어서 시끌한 새집을 보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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