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방

고독한 나의 방

by 빵굽는 건축가

(2020년 1월 4일)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경기도 하남에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이번 나들이는 지난해 4월에 새집으로 이사한, 저와는 20대 때부터 인권, 환경 같은 사회적 활동을 함께 하던 가까운 지인의 집들이입니다. 딸아이와 동갑인 쌍둥이 딸들 덕분에 인연의 끈을 이어가며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몇 달 만에 찾은 집에 고양이들이 함께 살고 있더군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집안에서 기르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며, 집짓기 전부터 주저하던 남편이었는데,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을 보니 가족을 배려하는 아빠의 마음이 느껴지는 한편, 집을 계획할 때 반려동물을 위한 장소와 가족의 생활을 예측하지 못한 제가 미안함이 생기더군요. 집만 지었으면 되었지 고양이 집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고양이를 아끼는 엄마와 쌍둥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아빠의 마음이 살펴졌습니다.


“땅을 구입했어요. 6대째 살던 집터인데 남향은 아니지만 산아래 경사진 땅을 딸아이의 학부모와 같이 구입했어요. 한 번 와서 봐주세요, 와 보면 놀랄 거예요. 수 백 년 된 ‘학자수’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땅이거든요 ”

“정말요 그렇게 오래된 학자수가 있다고요? 금방 다녀 가도록 할게요.”


나무 중에 으뜸가는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기던 학자수(회화나무)는 공이 많은 학자와 신하들에게 임금이 상으로 내리던 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선비나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서원이나 사당에 많이 심었기 때문에 ‘학자수’라고도 하더군요. 나무 이름에 얽힌 의미도 좋고, ‘회화, 학자’라는 어감이 부드러워 기억하고 있던 나무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볼까요? 부드럽게 경사진 산자락에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고 거기에서 서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우리 집을 짓는 그림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시나요? 가벼운 경사지에 든든한 나무가 서 있으니, 모양을 내기 위한 애를 쓸 필요도 없고, 어떻게 실내를 구성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즐거운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학자수를 향해 걸어가듯이 경사를 오르면 현관에 이르고, 나무가 서 있는 동측을 중심축으로, 서측까지 이어지는 깊이 있는 복도를 내어 거실과 식당에서도 나무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안방과 거실 사이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건너편 나무마루까지 시선이 이어집니다. 숲에서 불어오는 여린 바람과 잎 사이 빛을 느낄 때면 이곳이 우리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다시 복도에서 몇 계단 오르면, 쉬어가는 계단참에 이르고 그 자리에서 마주하고 있는 학자수를 볼 수 있습니다. 평평한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울기와 숲, 나무가 주는 질감(modality)의 변화를 발걸음에 입힐 수 있는 곳입니다. 6대째 살던 집이 있던 자리라서 그럴까요? 땅이 이끌어주는 대로 그려지고 만들어진 집이 되었습니다.


“나에겐 고독한 방이 필요해요, 지금은 고독한 방이지만 , 몇 년이 흐르면 다른 쓰임이 있을 거예요” 예상치 못한 아빠의 요구는 한동안 ‘고독한 곳’은 어떤 곳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 ‘아빠의 방’입니다. 시작과 함께 이 집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pimg_7184471112406292.jpg 학자수를 마주하고 있는 아빠의 고독한 방 창은 오른쪽에 가로로 긴 창이에요

지금은 ‘아빠의 고독한 방’이지만 가족의 중심이 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닫혀있지만 닫히지 않는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커다란 장지문이 벽을 대신하면 어떨까? 빛이 들 때 실내를 투과하는 부드러운 햇살을 만나고, 애매한 높이에서 오는 가벼움과 간소함, 1층 안방과 2층 아이들 방 사이에서 아빠의 방이 무게 중심이 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 선생이 즐겨 강조하는 “대화나 생활음이 울려 퍼지는 정도”를 고독한 방의 주변에 담아 보려 했던 것이죠. 이야기하는 소리뿐만 아니라 아빠가 늦은 밤 퇴근 후에 연주하는 클래식 기타의 울림, 계단을 오르는 맨발에 닿는 나무의 온도와 결의 감촉, 창호지에 비친 움직이는 그림자, 발걸음 소리가 이곳을 지날 때 아빠의 흔적 같은 감각으로 남기를 희망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려면 보통문으로는 그 역할을 담을 수 없기에 일반 문의 2배 크기(가로 1.4미터, 세로 2.1미터)로 만들고, 여닫이가 아닌 미닫이문으로 벽을 대신하면서도 조금만 밀어도 빼꼼히 다닐 수 있고, 열어 두면 하나가 되고, 닫으면 둘이 되는 그렇지만 완전히 차단되지 않도록 공기가 흐르는 큰 격자살 한식 문을 만들었습니다. 동양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호지 문과 나무 창호를 좋아하는 저의 오마주(hommage)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pimg_7184471112406976.jpg 2층 전실 나무책상에서 내려다본 아빠의 방 '장지문'이 보이시죠



지난가을에 찾았을 때는 안방을 내어 주더니, 이번에는 아빠의 고독한 방을 내어주더군요. 덕분에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이 집의 중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집은 생각과 이미지만으로는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만의 공기라고 할까요. 그런 분위기가 내부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장지문으로 들어오는 차분한 빛처럼, 1층 안방과 2층 아이들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달빛처럼 은은하게 정겨웠습니다.


추운 겨울 동안 고양이들이 살 수 있도록 현관을 내어준 가족은 커다란 거실 창을 현관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학자수가 보이는 동편 외부 데크에 근사한 고양이집을 지을 계획이라고 하니 가족들도 학자수의 넓은 뜰을 고양이들에게 주고 싶은 게 분명합니다.


계절이 바뀌면 현관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고양이는 제 집에서 가족들과 살겠지요. 그렇다 해도 고양이 알레르기로 눈이 빨간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발에 채이는 책도 정리하고, 집에서 지인들과 독서모임을 할 정도로 책 읽기를 즐기는 가족을 위해 거실의 규모를 줄이고 독서하기 좋은 작은 장소를 두서너 곳 두었는데 아직은 활발하게 쓰이지 않고, 여전히 책들이 발에 걸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어서야 의도한 대로 이용하지 않을까요?. 계단을 올라오면 펼쳐지는 기다란 2층 전실은 빛이 깊게 들고, 책상과 안마의자, 책장이 놓인 채로 여러 가지 성격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에 저도 작은 책상에 앉아 장소의 분위기를 느껴보았습니다. 놓여 있는 몇 권의 책과 연필들과 지우개, 작은 조명, 크지 않은 나무 책상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잘 어울리더군요. 종이 위의 장소가 가족들의 생활 습관에 맞는 자리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빠의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이른 아침에 이 집만이 가지고 있는 ‘평온’과 ‘다정함’을 느끼게 되더군요. 이럴 때 참 좋습니다. 격자무늬 살 장지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적당한 그늘, 벽마다 붙어있는 아이들의 그림, 가족사진, 기타와 악보, 저와 마주친 고양이의 걸음과 그림자가 어울리고 있더군요. 제 입가와 몸짓에도 편안함이 생겨납니다.

먼저 일어나 식탁에 앉아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읽고 있는데 안주인이 따뜻한 커피 라테를 내려주더군요. 고백하자면 이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풍미 있는 ‘아침 라테’입니다. “박노해 시인 사진전에서 구입한 시집이에요, 새해 선물로 드릴게요” 책 욕심이 왜 이리 많을까요? 기쁜 마음으로 받아왔습니다.


건축주 부부는 새로 집을 지으면 지금의 반만 되어도 좋을 것 같다고, 언제 일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집’을 그리고 있더군요.

살면서 자기 집을 지어보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보금자리를 짓고 싶은 본능은 감출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싶은 자기만의 장소를 저는 마음이 살고 싶은 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런 저에게 학자수가 물어보는 듯합니다.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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