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집장사를 하셨어요. 어린 시절에 도배도 되지 않고, 바닥에 노란 비닐 장판만 깔린 새집으로 몇 번인가 이사를 갔었지요. 어머니가 집장사를 하셨는데 새로 지은 집이 팔리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팔려고 내놓은 그 집에 가서 살았어요. 그래서인지 막연했지만 자라면서 엄마가 하던 일을 저도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어요. 집을 짓는 일 말이죠. 한 번이 아니라 계속 짓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건축주는 퇴임을 준비하는 수학선생님이십니다. 이메일을 보내주셨어요. 신정동에 20년 넘게 살았는데 오랫동안 보아오던 구옥을 드디어 계약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집을 리모델링 하건, 신축을 하든 기억을 담아내는 장소로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은 딸아이와 사위, 귀여운 손주, 큰아들과 며느리, 남편과 함께 각층을 달리해 한건물에서 살고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은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건축주는 비가 오는 일요일 오전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과 나들이 삼아 조합 사무실 ‘서재’에 찾아오셨습니다. 짙은 와인색 슈트를 입은 차분하고 따뜻한 느낌의 남편, 한눈에 보아도 신혼임을 알 수 있는 젊은 부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은 손주, 그리고 눈이 크고 아기의자 정도 되는 크기의 근육질에 매끈하고 검은색 짧은 털을 가진 프렌치 불독이 함께 왔습니다. 건축가라는 직업은 이런 만남에 즐거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당연하겠지요. 한 채의 공간이 한 사람을 위한 장소일 수는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건축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일로 시작합니다. 건축을 의뢰하시는 분들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방향들을 공간이라는 구체적인 위치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해주십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 같습니다. 저는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이자 때로는 책 속에 들어간 등장인물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겨울비가 오는 휴일 오전이라 걸려오는 전화도 없고, 마감해서 보낼 일도 없기 때문인지 여행지에서 처음 만나 같은 자리에 끼어 앉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가족들의 특별한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여행지와 다른 점이라면 한번 만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건물이 다 지어질 때까지 열두 달 가까이 꾸준하게 의견을 주고받고, 설계 중이나, 공사 중에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눈높이에 맞추어 풀어갑니다. 이 과정이 건축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건축이라는 과정을 즐기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이선생님은 땅을 구입하기 직전에도 연락을 주셨습니다.
“오늘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요. 부동산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땅을 계약하기 전에 건물을 짓는 동안 들어갈 설계비, 대략의 공사비, 세금처럼 앞으로 예상되는 비용은 알고 나서 토지 구입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데, 의견을 주실 수 있으세요?”
몇 주전 토요일 오후, 자전거 산책을 하던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지난 몇 년간 보아오신 토지 맞지요? 누가 말려도 구입은 하실 거죠? 앞으로 공사에 들어갈 비용은 무리하지 않고 선생님 형편에 맞게 지출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시면 될 거예요”
계약 직전에 자기 마음을 확인시켜줄 누군가가 필요하셨던 것이겠지요. 옷을 사러 가서 이것저것 입어보고, 마지막에 묻는 질문처럼 “잘 어울리지요? “ 확신을 갖지 않았다면 물어볼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오랜 기간 점찍어둔 마음의 물건을 살 경우에는요.
주변 사람들이 제게 그러더군요 “겁나지 않아요? 한두 푼 주고 사는 땅도 아닐 텐데, 구체적인 계산도 없이 땅을 사라고 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의 일상에 끼어들어 그 들의 삶에 동행하는 것 같아서요. 저라면 겁날 것 같아요. 세상일이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화장지 풀리 듯이 휘리릭 풀리지도 않을 텐데요” 듣고 보니 겁이 날만도 합니다. 그래도 남은 일정을 형편에 맞게 걸어가면 무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에, 저와 건축가들이 동행을 할 것이고, 자기 분수에 맞게 삶을 살아오신 선생님 같기에 겁이 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건축가들은 가족의 꿈, 바램, 행복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라고 치켜세워주시니, 과분한 칭찬에 보답이라도 하려고 커피해피에서 보내온 산미 가득한 약배전된 ‘케냐 TOP 피베리’를 내렸습니다. 손가락이 착 감기는 흰 잔을 따뜻하게 데우고, 그 안에 커피를 따르니 휴일날 좋은 찻집에 지인들을 모신 것 같더군요.
오래된 토지라 대지의 경계가 불분명할 테고 어쩌면 이웃집에 대지의 경계가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심하면 건물이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씩 풀어가야 할 일이 많은 땅일 것입니다. 1층은 퇴임 후 운영할 카페를 들이고, 2층부터 나머지 층은 임대를 놓지만 나중에는 자녀들이 사용할 사무실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10년 후 가족의 삶을 담는 쓰임으로 계획하고, 공사를 하게 될 새일을 의뢰받았습니다.
측량 날짜를 받아 현장에 가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과제들이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겠지요. 단정하고 쉬운 일보다 이런 일에서 유쾌함을 찾는 조금 이상한 건축가들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10년 후 가족의 삶은 어떤 장소에서 이루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