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때는 다 그래요"
(2019년 12월 30일)
때로는 우리 마을이 살아있는 나무 같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마을 입구 공동주차장에서 시작해 부드럽게 굽어진 흙길은 커다란 나무둥치처럼 미끈하게 마을 끝까지 이어지고, 연꽃이 피어나는 작은 연못을 지나면 밑동이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 나오는 굵은 가지처럼 집과 정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체통, 텃밭, 오두막, 닭장, 커뮤니티, 빨래를 널어놓은 마루를 품고 있는 동네에서 삼삼오오 모여 ‘깔깔’ 웃는 소리를 내는 이웃들과 쪼르륵 모여든 새들의 풍경은 어딘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눈이 자주 와야 아이들이 눈집도 만들고 썰매도 탈 텐데 이번 겨울은 눈 대신 비가 자주 오고, 햇살이 너무나도 화창해서 겨울이 제 계절을 망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처음 얼굴을 마주치고 이름을 나누고, 집에 대한 꿈을 이야기 한지 올해로 11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막연하기만 했던 낯선 이웃, 주택, 텃밭, 지역, 마을살이에 대한 꿈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아무도 지금처럼 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지금처럼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 계획을 세우고 주장하고, 규칙으로 만들었다면 우리 동네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잘 살 거야’라는 바람으로 여행을 떠나 듯 같은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뿐인데 돌아보고 나니 1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 삶이 어떠하냐”라고 묻는 다면 “땅을 딛고, 생활하는 집에서 살고 있어요.”라는 표현 외에는 할 말이 없네요. 다만 지난 세월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면 몇 날 며칠을 해도 부족하지 않은 사연들이 있답니다.
‘이웃이 있는 동네’를 만들어 보자고 모인 10년 전, 지역의 풀뿌리 모임 장소인 ‘백성 교회’ 백색 칠판에 한 줄로 써보았습니다.
‘우리 함께 살아볼까요?’
한 번은 가족을 위해, 또 한 번은 이웃을 향해, 인생의 두 번째 프러포즈가 시작된 것이죠. ‘우리 함께 살아볼까요?’ 지금도 우리를 기다랗고 굵은 마을길처럼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중학생들은 출근하는 어른들과 같이 통학을 하고,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들도 카풀(carpool)을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살게 되더군요.
입주 잔칫날 축하해주러 온 지인의
“함께 사는 게 어때요?”라는 질문에
“재미나요 매일 같이 차 마시고 밥 먹고 영화도 같이 봐요”
그러자 지인은
“신혼 때는 다 그래요”
‘백성 교회’에서 선을 보고, 집을 짓기 위해 3년간 ‘연애’하고, 이제 신혼은 지나간 것 같습니다. 흔한 말로 지지고 볶고 살아온 결혼 8년 차 동네의 송년모임은 매년 12월 25일입니다.
크리스마스 맞이 겸, 한 해를 마무리하는 모임입니다. 지난 6개월간의 마을 총무 소임도 마치고 신임 총무와 회장을 뽑는 날이기도 합니다. 마을회관 열쇠 교체, 보일러 교체, 울력 시간 커피와 빵 준비, 2주에 한 번 일요일 저녁에 볼 쏠쏠한 영화를 선정하고 상영하기, 마을길 흙포장 계획하고 실행하기, 졸업생 선물 준비, 1년 동안 있었던 마을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만들기, 회관 부식(쌀, 기름, 떡국, 소금, 국수, 멸치) 준비하기, 계절별 가로등 점등시간 조정하기, 가스 점검하고 신청하기, 이장님 댁과 이웃동네(장미마을) 방문 행사 준비 세어보니 총무와 회장이 없으면 동네가 돌아가지 않았을 것 같이 많은 일들을 했군요.
각 집에서 준비한 송년회 일품요리로는 ‘라따뚜이, 연어샐러드, 아로니아 샐러드, 족발, 생선 튀김, 현미 호박떡, 땅콩조림, 황태 튀김, 호박죽, 된장국입니다. 밥상을 펴고 30명의 식구들이 둘러앉아 소란스럽고 따뜻한 밥을 먹는 입가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영상으로 만든 ‘2019년 마을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가 주연이자 조연이고 배우들입니다. 감독도 없고, 연출도 없고, 정해진 규칙이 없어도 잘 살고, 조금 부족하고 생각의 차이가 있어도 서로를 인정할 만큼 익숙해진 사이입니다. 마을을 이루는 요소에는 길, 집, 회관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관계에서 오는 따뜻함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도 내년에는 올해보다 좀 더 따뜻한 이웃이 되어야겠어요.
올 한 해 마무리 영화는 애니메이션 <에델과 어니스트>입니다. 영화관에서 볼 때와 동네에서 함께 영화를 볼 때의 차이점은 보는 중에 떠들 수 있고 자유롭게 자세를 바꿀 수 있는 편안함이 있고, 무엇보다 영화의 감흥을 나눌 수 있어 미처 느끼지 못한 다른 시선까지 살필 수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우리 집에서 준비한 음식은 각종 야채를 토마토소스에 버무려 오븐에 구워낸 ‘라따뚜이’입니다. 삭삭 비워진 큰 접시를 보니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