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점심은 밥, 국, 김치

나무 시계와 칠판은 크리스마스에

by 빵굽는 건축가

집을 짓기 시작한 지 2년
집을 짓고 이사한 지 1년 만에 건축가들이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회사를 운영하시다, 퇴임하고 작은 집을 짓고 소목 일을 취미 삼아 괴산 청천면에 살고 계시는 건축주는 제 기억에 할 말은 속시원히 다 하고, 하기로 한 일은 변경하지 않고 함께 하셨던 분입니다.

“정 소장님 조합에 필요한 물건 없을까요?, 칠판을 하나 만들어 보내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몇 주전에 사무실에 오셔서 칠판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시고선 입고 오셨던 외투를 놓고 가셨습니다.

놓고 가셨던 외투를 챙겨 들고 1년 만에 집들이에 왔습니다. 디자인을 하는 동안 종이 위에서 한참을 돌아다닌 집이고, 공사 중에 자주 왔었기 때문에 익숙한 심 선생님 댁이었지만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동안 보아오던,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가을날 깊고 환한 빛이 뜰에 반사되어 주방과 거실을 빛으로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공간의 구성을 잡고,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풍경이었습니다. 현관에 서서 한참 동안 그 빛을 지켜보았습니다.

건축에 매력이 있다면 전문가라고 분류된 건축가가 지어주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소를 사용하는 집주인, 생활하는 이들이 만든 일상의 흔적, 지구별의 축이 바람과 빛을 365일 다른 각도로 이끌어 주는 장소의 유연함과 여유,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 갈래의 따듯한 빛을 등에 안고 안주인이 만들고 있는 맛있는 요리 냄새와, 전을 지지는 맑은 기름 소리가 귀에 들리고 나서야 현관에서 거실로 발을 들였습니다.

빛이 어린 주방 벽에 지름 28센티 정도 될까요? 동그란 판벽의 나무 시계가 걸려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겠죠. 심선생님이 만든 ‘나무 시계’라는 것을요.

동그랗고 밝은 나무 결판에 12개의 짙은 나무 점이 360도를 회전하듯이 가지런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점을 향해 각도와 길이를 달리하는 시침과 분침은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깊은 가을 한 낯 몇 시에 어떤 모양과 색깔의 빛이 드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순간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칠판에 저 시계가 붙어 있으면 특별한 칠판이 되겠는걸” 싶었습니다.

심선생님 “칠판에 시계를 하나 달아주세요.” 느닷없는 건축가의 요청에 심선생님의 표정은 혹을 하나 더 붙인 얼굴이 되었습니다.

“왜 전에 칠판 선물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거기에 저 시계를 달아주세요” 들어오자마자 묻지도 않은 질문에 망설임이 없이 시계를 달아 달라고 하는 제 모습이 땡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는지, 안주인께서도 “여보 칠판에 시계를 달면 괜찮겠다”며 거들어 주십니다.

심선생님도 이런 저희들의 요청이 싫지는 않으셨나 봅니다. “저 시계가 맘에 드세요? 다른 디자인도 많은데 저게 좋다 하시네요”

집을 다 짓고 나서 한 동안 살다가 식사에 초대받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제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 그냥 찾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집을 짓는 동안은 잘해보자는 마음으로, 다 짓고 나서는 수고들 했다는 마음으로 마주 앉아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살면서 이렇게 초대를 받을 때입니다.


식당에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직접 밥을 지어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밥 한 끼에 반찬이 한 가지, 밥, 국, 김치라고 해도 이런 초대는 따뜻하고 행복해집니다. 아마도 건축주의 맘속에 “살아보니 이 집이 제법 괜찮습디다”라는 표현이 숨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사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늦게 초대하네요. 차린 것은 없지만 맛있게들 드세요. 반주도 한 잔 하시고요”

현장 식구들과 디자인에 참여했던 건축가들, 저까지 모두 5명이 초대받은 늦은 가을입니다.

현장에 일회용 컵을 못쓰게 하는 최 팀장님은 “잔칫집 같아요. 맛있게 먹겠습니다.”라며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수저를 듭니다.

계란물 입힌 녹두전과 생선전, 들깨가루와 들기름으로 무친 나물, 구수한 배추 된장국에 직접 쑨 도토리묵이 한상 차려졌습니다.

심선생님 부부를 처음 만났을 때 일곱 바퀴는 구를 수 있는 긴 복도가 필요하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일곱 바퀴를 구르고도 남을 그 장소와 이어진 곳에 식탁이 놓이고 한발 더 걸으면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게 이어진 곳에는 심선생님이 만든 엉덩이가 편한 원목 스툴이 놓여있고 화분에는 벤자민이 놓여있고 그 옆에 제라늄 분홍 꽃이 피어 있습니다.

현관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던 그곳에서 건축가들이 맛있는 수제 맥주와 된장국을 먹었습니다. 이럴 때가 참 감사하고 보람찹니다. 따뜻하게 맞아주신 심 선생님 댁의 따뜻함이 가을볕 같습니다.

밥해주는 집주인들이 있어 행복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건축가라는 생각이 드는 계절입니다.

참 시계가 달린 칠판은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들고 오신다고 하네요. 벌써 크리스마스 산타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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