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당으로 들어온 햇살

길게 이어질 인연과 회랑

by 빵굽는 건축가

겨울로 안내하는 가을비가 새벽부터 내리는군요. 장맛비처럼 신발과 바지를 다 젖게 만드는 바람도 불고 있습니다. 내일 오전에 가평에서 있을 설계 발표로 마음이 분주합니다. 전체 구성을 마치고, 이제 설명을 위한 자료를 만들면 됩니다. 창의 높이와 가구 배치, 문의 형식, 같은 구체적인 설계로 들어가기 전 단계라고 하면 어울리겠습니다. 경사진 땅 북쪽에 자리한 산뽕나무는 자동차 핸들 정도의 굵기로 나이가 있어 보입니다. 여름철 오후 뙤약볕에도 애정이 생길만한 느릅나무는 한 뼘 굵기의 가지가 세 갈래로 뻗어 나왔습니다. 수리재라고 불릴 만큼 바람이 드는 가평 토지는 맹금류의 수리가 날개를 펼쳐 바람을 가르며 먼발치의 능선들을 길게 바라볼 것만 같은 장소입니다. 이곳에 집을 짓는 일을 의뢰받았습니다.

공간을 만드는 일은 우리 같은 건축가들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은 건물이 지어질 장소를 이해하고, 그곳이 필요로 하는 건물, 집주인의 내면 깊이 자리해서 말로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 장소를 찾아내야 합니다. 중국계 지리학자 이푸투안은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고 합니다. 글로 쓰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언어를 초월하는 무의식과도 같은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김 소장님 내일 가평에서 미팅이 있잖아요, 구성을 잡았는데 같이 볼까요?”

내년 봄에 시작될 일이지만 현장을 이끌어가야 하는 김 소장은 새로운 장소와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난 얼굴로 자리를 고쳐 앉습니다.

의자를 당겨 가까이 앉은 김 소장과는 90도 꺾인 왼편에 서서 주택의 구성을 설명할 준비를 마칩니다. 겨울 아침 안경에 하얗게 김이 서린 세상을 보는 것처럼 배경이 옅게 비치는 하얀 트레이싱지를 짙은 갈색 제도판에 올리고, 배치와 평면도의 방향을 잡습니다. 습관처럼 도면의 남쪽은 김 소장 앞으로 놓고, 북쪽은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위쪽을 향하도록 도면을 겹쳤습니다. 김 소장을 기준으로 오른팔은 동향, 왼팔은 서향 인 셈이죠.

회랑이 열십자로 길게 이어지는 평면도를 고쳐 잡고, 회랑이 교차하는 지점에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는 봉당 자에 손을뻗어 검지손가락을 내밀어 올려놓습니다. 봉당에서 서쪽으로 회랑을 따라 몇 걸음 가면 느릅나무를 볼 수 있는 창과 방에 이르고, 다시 봉당에서 동쪽으로 다섯 걸음 움직이면 남향 빛을 마주한 화장실과 파우더룸, 욕실이 자리합니다. 봉당에서 북쪽로 이동하면 동향과 서향의 가운데를 걸어가듯 다용도실을 거쳐 주방으로 이어지고, 그 끝에 자리한 산뽕나무 아래 거실 겸 식당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봉당을 중심으로 꺾인 실내 회랑은 사계절 내내 생활하는 장소이자, 풍경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나침판으로 비유하자면 봉당은 나침판 바늘의 중심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바늘을 따라 거기서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실내 회랑과 나란히 깊은 처마로 만들어질 외부 회랑이 있습니다. 내부 회랑이 겨울을 위한 것이라면 기둥 없이 지붕만 있는 외부 회랑은 봄, 여름, 가을용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일 건축주에게 설명을 하기에 앞서 공사의 눈으로 볼 때 점검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지 구성의 의도와 공사의 조건을 살펴봅니다.

김 소장은 손으로 스케치한 연필 도면을 바라본 채 “음 봉당이 이 집의 중심이네요, 집 전체에서 남쪽의 중앙에 놓였으니 현관이자 응접실, 온실 역할까지 하는군요. 봉당에서 이어지는 내부 회랑과 외부 회랑의 구조형식이 매력적이네요. 굵은 나무보가 내부에서 외부로 그대로 이어지면 힘이 있겠어요.” 김 소장은 문화재 현장에서도 오랜 시간 시공을 담당한 경험으로 나무와 쇠, 콘크리트 같은 원재료의 질감과 성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스케치만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가평 주택에도 좋은 장소들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여기 외부 회랑의 높이가 중요하겠어요. 어떤 높이로 해야 할지는 현장에서 결정을 하면 확실해지겠네요” 도면보다는 1:1로 지어질 땅의 조건을 더 중시하는 현장 식구들의 반응에 저 역시 한 표를 보태어 줍니다.

내일이면 세 번째 만남입니다. 2년 전에 전화로 인사를 나누고, 한 달 전에 사무실에 찾아오신 건축주는 큰 고민 없이 질문도 없이 어쩌면 당신 인생의 마지막이 될 집을 의뢰하셨습니다. 소개로 찾아오셨으니 더 이상 간 보고 그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다음 미팅을 약속 잡았고, 내일은 건축가들이 이해한 땅과 생활하는 장소에 대한 초안을 보여드리게 됩니다. 분주했던 마음도 김 소장의 확신에 찬 몇 마디 덕분에 가벼워집니다. 열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땅을 이해하고,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집주인과 같이 즐길 수 있는 제 직업엔 매력이 있습니다. 땅과 나무, 바람, 하늘,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결과는 늘 새로운 장소에 대한 설렘으로 남게 됩니다. 지은 지 8년이 넘도록 연락을 주고받는 명달리 최 선생님 소개로 찾아온 가평 선생님도 긴 시간 인연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다 지어지면 봉당에서 차 한잔 하면서 수다를 떨고 있겠지요. 봉당으로 들어온 햇살이 회랑을 따라 집 전체에 퍼질 때쯤에 맞추어 찾아가면 더 맛있는 차가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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