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와 그림으로 버무린 풍미있는 노트 .
대학을 졸업하고 지도 교수님과 선배들이 운영하던 건축 스튜디오에서 몇 해동안 실무를 익혔다. 건축사무소 특유의 냄새가 베인 시절이다. 늦은 시간까지 켜있는 밝은 실내등, 종이 위에 직선과 곡선, 빨갛고 검은색이 그어진 도면, 여기저기 놓인 여러 형태의 모형들, 동그란 얼굴에 쓴 안경 코받침을 밀어올리며 고민하던 선배, 성격이 담긴 목소리의 질감, 스튜디오 살림을 도맡아 하던 허선배가 바른 자세로 앉아 깨알 같은 글씨로 노트를 정리하던 모습, 풍경에 그려진 그날의 냄새가 나게 한다.
스튜디오를 그만두고 나서도 몇 해 동안 내게 유산처럼 이어진 습관들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지도 교수님 웃음소리를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었고, 허선배처럼 노트를 쓰고 있었다. 교수님의 웃음은 몇 년이 지나 사라졌지만 노트 쓰는 일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선배처럼 깨알 같은 글씨로 쓰지는 않지만 기억을 차곡히 옮겨 담는 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문구점에 가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도 스케치하기 좋은, 녹색 토드백에 넣기 편하고, 보관이 좋아 보이는 노트들과 문구류를 구입하는 일은 나에게 주는 사치 중에 하나다. 노트를 주제로 쓰인 책이 서가에 꽂혀있고, 연필에 관한 기록이 담긴 책을 구매하는 나에게도 편집광 비슷한 집착이 있음을 본다.
지금은 스마트폰에 저장할 수 있는 에버노트를 사용하고 수시로 스케치와 회의 내용, 할 일을 적어두는 손 노트도 함께 사용한다. 에버노트는 사진과 서류를 담아두고 손 노트의 내용도 사진으로 넣어둔다. 먼길 출장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동행하는 이가 없다면 노트가 동행자가 된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짬이 나는 시간에 노트를 들추어 보거나, 일어난 생각을 적다 보면 시간의 기억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무인양품에서 나온 황갈색 표지의 무지 노트를 들고 다닌다. 인터넷에서 구입하면 가격도 저렴하고 매수도 넉넉해서 손때가 묻고도 한참을 쓸 수 있다. 아마도 손 노트는 평생을 쓸 것 같다.
나의 노트에는
생각나는 이야기와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버스 안에서 내 앞에 앉은 사람의 뒷모습을
강의실에서 잠시 쉬는 시간에 그린 풍경을
여행 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이 노트에 들어간다.
사진이 주는 기록의 맛도 좋다.
내 손으로 그린, 잘 그리고 못 쓰고는 별 의미가 없는,
내 손맛이 주는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는 손짓도 좋다.
몇 해 전 여름 발효빵을 배우면서
쉬는 시간 틈틈이 그린 손 노트를 보면
빵을 배우던 날들의
온도와 습도, 냄새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과 사진, 손글씨는 우리들의 기억과 경험이다.
그때의 느낌과 순간을 보여주고 저장한다.
내 손으로 그리고
내 눈으로 본 것을 담아낸 노트에는
나만의 분위기가 있어서 마음에 든다.
나의 노트는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