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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마이너스가 아니다

by 덕후 미우
"지금 홀로 있어서 외롭고 슬픈 생각만 든다면, 그래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온갖 소음 속에 자신을 던지고 있다면, 당신은 찾아온 황금 같은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과 같다." 번잡한 일상에 얽매인 채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불행한 존재라고 규정짓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홀로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고독에 속수무책으로 무릎 꿇지 않고 그 시간을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으로 치환한다면, 삶에 부정적인 그림자가 끼어들 틈새는 없을 것이다. (p17, 고독의 힘)


본격적으로 내가 나를 마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예전보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최근에는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혼밥족을 비롯해서 일상 생활과 문화 생활을 하면서 홀로 즐기는 사람이 흔해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약간은 쓸쓸함을 느껴야 했던 '1인'이라는 말이 이제는 서서히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지나친 인간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처음부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더욱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때로는 방 안에 불을 꺼둔 상태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라며 끊임없이 나에게 물었다. 일명, 고독의 시간으로 말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찾지 못할 답을 찾고자 자문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선택지를 알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


주변에서는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즐거울 수도, 행복할 수도, 진짜 미소를 지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오히려 불편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어디를 가고 있는지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유명 관광지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고 할까?


외톨이, 고독 같은 단어는 늘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나기 위해서 사용하지만, 나는 외톨이와 고독이 꼭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잠시 외톨이가 되어 고독을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사람은 '나'를 마주보면서 가짜 속의 '진짜'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나는 거의 히키코모리 같은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이후에 군대에 가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면서 점점 방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시간이 너무 괴로워서 친구를 만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만날 사람도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고,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아르바이트는 더욱 하기 싫었다.


돈이 부족하다면 아르바이트를 한 번쯤 해보자고 생각했겠지만, 당시 2011년과 2012년은 블로그 시장이 고도 성장기를 맞이한 시기라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일주일에 두 번은 치킨을 먹고도 매달 70만 원의 적금을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방 안에서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겪은 아픔을 마주하면서 글을 쓰는 데에 여념이 없었고, 조금 더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상태를 만들고자 깊은 고독에 빠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할 수 없는 일'의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것도 착각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고독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뚜벅뚜벅 걸으면서 오늘 여기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길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그 님과 살 수 있는 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독의 힘>을 읽어보면 이런 말이 있다.


"고독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잘 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든 돈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그런 것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한테 저절로 따라오는 것들이니까요. 나는 늘 생각합니다. 왜 봄이 되면 꽃이 피어나는가? 그 이유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나에게 고독이란 이름으로 내 앞에 피어난 봄의 꽃들은 바로 나를 일으켜 세운 축복이었지요."


솔직히 나는 고독을 잘 다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독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외로움에 괴로워한 적도 있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깊은 고독에서 마주한 감정을 글로 옮기다가 또 혼자서 울어버린 적도 많았다. 지금도 종종 혼자 밥알을 씹다가 문득 몸을 차갑게 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눈물이 맺힐 때가 많다. 나는 고독 속에서 글을 쓰고자 했지만, 때로는 고독 속에 파묻기히도 했다.


고독을 마냥 이겨내야 한다거나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나는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히 고독 속에서도 봄에 피는 꽃처럼 희망을 전해주는 수 많은 이야기를 만났기 때문에 나는 버틸 수 있었다. 이야기를 읽고 또 다른 이야기를 적는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흐릿하게 보이지 않던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 과정이 바로 삶이라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전략가가 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같이 나의 게으름, 나의 나태함, 나의 부족함과 싸우면서 타인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삶 속에서 혼자가 될 수 있는 고독이라는 방을 가지고 있었던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비록 이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에는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지만, 굳이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독의 힘>에서 저자는 "사실 인간관계와 행복의 연결고리는 매우 허약하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다면 삶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인간관계가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은 지나친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나 또한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인간관계가 서투른 나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가지는 가치를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오늘날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한 사람이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사람과 소통하지만, 과연 그 사이에서 진정한 인간관계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인간관계는 몇이나 될까?


누군가는 '모든 인간관계가 소중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말 속에는 '나는 내가 맺은 인간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막상 자신이 빠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돌아가는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견고히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혼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은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을 받아들이지 못해 망가질 가능성도 있다.


<고독의 힘> 저자는 "우리 삶은 고독이라는 어둠 속에서 한층 견고하게 지켜진다."고 말한다. 고독 덕분에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나를 만들 수 있었다. 여전히 편견 어린 시선과 군중의 시선에 두려워하며 몸을 떨지만, 눈빛 만큼은 불굴의 의지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지나간 20대를 돌아볼 수 있는 거니까. 나는 앞으로도 고독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과연 사람 속에 뒤섞일 때와 홀로 있을 때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삶과 철학에 물어보는 것이 답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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