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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누구에게나 아픈 법이다

by 덕후 미우
"김치는 재료와 숙성이 중요합니다. 이 재료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얻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들처럼 토익 800점이나 어학연후, 각종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800가지의 경험이라는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재료를 얻으시느라고 많이 힘드시나요? 저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지쳤습니다. 하지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재료가 적다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재료가 최고의 재료입니다. 그 재료로 여러분만의 최고의 김치를 담가보시기를 바랍니다." (김치 CEO 노광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어릴 때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이 겪는 아픔이 가장 아픈 법이고, 자신의 상처가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다. 매일 같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일을 스스로 분노하며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멸망하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으로 잠에 들었다. 어쩌면 이때가 당시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불행한 나'라는 보호막을 찾으려고 했던 시기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나만 불행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았고, 나만큼의 상처를 가지고도 세상을 향해 웃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에 반해 나는 '나는 피해자다.'라는 이름표를 써 붙인 후에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멍청하기도 하고, 10대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며 그때의 나를 애썼다며 토닥여주고 싶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어려움을 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불행을 모조리 피해가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불행과 행복이 돌고 도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배려'라는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이 생겨난다. 내가 무엇을 해도 불행하다는 사고에 갇혀 있으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빛이 바래버린다. 다채로운 이 세상은 오로지 모노크롬의 세상이 되어버리고, 파란 하늘은 잿빛의 비가 내리는 하늘처럼 느껴진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렇게 세상이 느껴질 때가 있다. 높은 가을 하늘을 우러러보며 날씨가 참 좋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반면, 내 주변의 모든 색이 갑작스레 사라져 잿빛 세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아직은 '나는 불행하다.'는 이름표를 완벽히 떼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이 보여주는 것일까?


비록 정답은 알 수 없지만, 나는 수 많은 군중 속에 나라는 작은 그릇을 강하게 느낄 때는 항상 마음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책을 읽으려고 했다.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 속에 생겨난 커다란 구멍을 메꾸고 싶었고, 울고 싶어도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때때로 마음이 무뎌질 때마다 읽는 책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너무나 고달팠던 10대와 오늘의 20대 시절까지 큰 힘이 된 책 중 하나는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이다.


책 <연탄길>에 적은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는 누군가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듯 했다. 그저 눈으로 이야기를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게 해준 최초의 책이기도 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다시 한번 <연탄길>을 읽어보고 싶은 이유는 가식적인 이야기와 넘치는 시대에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다시 한번 <연탄길>을 읽고 적은 글에는 <연탄길>에서 아래의 부분을 옮겨놓았다.


삶은 때로는 흉악한 거인을 앞세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흉기를 든 거인 앞에 우리는 맨주먹이지만, 아직 싸움이 끝난 건 아닙니다.

희망을 가진 자 앞에서 인생은 마술을 보여주니까요.

고통은 기린의 목처럼 길지만, 그만큼의 높이에 희망을 매달고 있습니다.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아픔이 있다는 건 아직도 꿈이 남아있다는 거니까요.


당시 블로그에 <연탄길>을 읽고 다시 글을 쓴 때는 내가 다시 깊은 내적 고민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2014년에 적은 글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볼 때가 많아졌다. 과거보다 분명히 더 재미있는 일이 내 곁에 있고, 그저 의미 없이 보내던 나날과 달리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있는 공허함은 점점 더 커지면서 나를 집어삼키려고 한다. 밥알을 씹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고, 유독 슬픈 노래와 슬픈 이야기에 더 눈물을 흘린다.'라고 적어놓았다.


역시 나라는 인간은 그때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삶을 살면서 몇 번이나 '지금, 여기'의 의미를 잃어버려 헤매던 적이 있었다. 2014년에 비해 3년이나 흐른 지금은 그때보다 더 분명한 목적과 비전으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살아가는 의미는 눈에 보이는 듯하다가 또 어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이유는 다양하다. 내가 실수를 했거나 괴롭거나 도망치고 싶거나 의욕이 떨어졌거나….


그때마다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이며,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다시 물어야 했다. 소설 <이방인>에서 카뮈는 "삶의 으미를 찾아 헤매고 있다면 그것은 삶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을 쓰는 데에 영감을 준 대니얼 클라인은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에서 '삶의 의미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을 생각함으로써 스스로가 만든 삶의 의미에 온전히 도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살은 아니지만, 몇 번이나 죽는 이미지를 상상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지금도 높은 곳에만 올라가면 땅에서 나를 향해 "지금이야, 뛰어내려. 자유가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아 좀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지 못한다. 투명 유리로 양측을 감싼 계단을 오를 때는 한 발작을 뗄 떼마다 내 발이 내 의지를 무시한 채 밖으로 뛰어내릴 것 같아 두려움에 삼켜질 때도 있다. 사람의 마음에 쌓인 두려움과 아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이렇게 나를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용기를 내어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올라가는 것처럼, 내가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아파보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것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의 제목 그대로 나는 한번 아파봤기 때문에 내가 아파보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상처에 괴로워하지만,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이니까.


KBS <강연 100℃>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우연히 만난 김치 CEO 노광철 씨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재료를 얻으시느라고 많이 힘드시나요? 저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지쳤습니다. 하지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라는 진솔한 고백은 당시에 큰 울림이 있었다. 마음이 아려오는 한편,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이겨낼 수 있다며 마음을 다독였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아픈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아픈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아프기 때문에 나는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참으면서 견디는 게 아니라 때로는 나를 위해 시간을 만들어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소비 활동, 혹은 책을 쓰거나 음악을 만드는 생산 활동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웃을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껴보는 것이다.


정말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야! 정말 이 음악을 들어서 다행이야! 정말 이 친구를 만나서 다행이야!


모든 건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지만, 인생의 의미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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